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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규 소설가 “식물처럼 연애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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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적확하게 이해한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 2021년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등단한 소설가 윤치규의 첫 단편집 『러브플랜트』에는 사랑하는 상대를 백 퍼센트 이해하는 ‘좋은 남자’가 되고 싶지만, 뜻하지 않게 자꾸 어긋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어딘지 낯설지 않은 이들의 어설픈 모습은 작가 자신의 단면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소설 쓰는 30대 이성애자 남성”이라 칭한 그는 앞으로도 당사자성이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잘 쓰는 것보다 오래 쓰고 싶어 

은행에서 가계 대출 업무를 담당하신다고요. 오늘은 쉬는 날인가요?

네, 휴가를 냈어요. 직장 동료들은 인터뷰 가는 줄 모르고요. 그냥 쉬는 줄 알고 있어요(웃음).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전까지 직장과 합평 수업 양쪽에서 ‘독특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 같아요. 소설과 금융은 양극단의 일처럼 느껴지니까요.

직장에서는 은근한 무시가 있었어요. 자격증 따고 승진 시험 준비해야지, 무슨 소설이냐는 식이었죠. “대리님, 소설 쓴다면서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따금 부끄럽고, 때로는 모욕감이 들기도 했고요. 반대로 합평 모임을 가면 “상근직으로 근무하면서 소설까지 쓰다니 대단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종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간극이 좁은 시대이다 보니 회사에 다니면서 등단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분들께 좋은 롤모델이 되고 싶어요. 

지금은 어때요? 평가가 달라졌나요?(웃음)

직장에서 “너는 꿈이 있는 친구였구나, 예술가였구나”라면서 추켜세우실 때가 많아요(웃음). 특히 연세가 높으신 상사분들은 신춘문예를 마치 과거급제처럼 생각하시더라고요. 등단이 직장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죠.



신춘문예 2관왕에 올랐어요. 계속 낙방해서 마음을 내려놓던 차였다고요.

문학과지성사에서 합평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 소설을 배웠어요. 5년 정도 준비했는데, 두 번째 해부터 최종심에 올라가다 보니 계속 기대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매달렸는데요. 매번 최종심에 낙방하면서 ‘내가 넘지 못하는 벽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어요.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을 때 당선이 되었죠.

사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근무했고, 지금은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죠. 이력이 독특한데, 소설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요?

어릴 때부터 유일한 취미가 소설을 읽고 쓰는 거였어요. 인터넷에 추리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는데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추리소설 쓰는 걸 그만뒀어요. 원래 소설 속 인물을 굉장히 쉽게 죽였는데, 이제 누군가가 죽는 설정은 도저히 쓸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러면서 한번 진지하게 소설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단편을 습작하면서 앞으로 소설 쓰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군대도 소설을 쓰려고 그만두었죠. 직업군인으로 일하면서 습작할 시간을 내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4시에 문을 닫는 은행에 취직하면 소설을 더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은행원이 됐어요. 은행원은 4시부터 개인 업무가 시작된다는 걸 몰랐죠(웃음).

등단을 준비하던 시간은 어땠어요?

합평 모임에서 만난 문우들이 다 좋은 사람이어서 즐거웠어요. 저는 소설가가 되는 데 제일 중요한 건 좋은 문우를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문우는 내 소설을 읽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죠. 독설하는 사람은 최대한 멀리해야 해요. 글 쓰기는 괴롭고 힘든 일이잖아요. 습작생일 때는 자꾸 소설을 쓰고 싶게 만드는 게 중요한데, 소설을 나쁘게 평하는 사람을 만나면 점점 더 쓰기 싫어지거든요. 저는 문우들의 피드백을 통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조선일보>에 연재한 ‘일사일언’ 에세이에서 “직장생활을 병행해야 더 열심히 소설을 쓰는 부류”라고 했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소설을 잘 쓰는지, 내 소설이 좋은지에 대해 자기확신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도망칠 구석이 필요해요. 저는 방어기제가 있어야 더 즐겁게 소설을 쓸 수 있더라고요. ‘내가 부족한 건 전력투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전업작가를 지향했다면 지쳤을지도 몰라요. 제 성격상, 어떤 작품이 독자의 호응을 얻는지 분석하고, 트렌드를 따라하려고 노력했을 테니까요. 아마추어리즘으로 즐겁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래 쓰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무대에서 내려오지만 않으면 누군가는 제 소설을 읽어줄 거라 생각해요.



사랑이지만,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

「일인칭 컷」은 비혼식을 계획한 여자친구 ‘희주’와 ‘나’의 이야기입니다. 얼핏 평등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미묘하게 다른 지점에 서 있는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선명하게 보이는 점이 인상깊었어요.

한창 미투 운동이 활발했고, 회사에서도 사내성폭력 이슈가 많았던 때에 처음 썼던 작품이에요. ‘남성으로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호기롭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면 쓸수록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이 나왔죠. 사실 결말을 쓰면서 너무 아쉬웠어요. 어떤 사건을 겪고 남자 주인공이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평소에도 그런 성찰을 할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누나가 세 명 있는데요. 누나들에게 늘 부채감이 있었어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차별받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의식있는 남자야, 나 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했거든요. 분명 젠더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인칭 컷」을 쓰면서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의식이 있는 것과 실제로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완벽한 밀 플랜」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현영’을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결혼을 추진한 남성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깨닫죠.

사랑을 할 때 흔히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고, 그게 디폴트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결혼을 해도 상대와 닿을 수 없는 간격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잖아요. 상대방이 나의 기대에 맞춰 행동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일 뿐인데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상태에 대해서 써보고 싶었어요.

「러브 플랜트」에는 이혼한 남녀가 등장합니다. 꽃집을 운영하는 남자 주인공 ‘백현준’이 ‘고백할 때 제발 꽃 사지마 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설정이 재미있었어요.

제가 근무하는 은행 앞에 실제로 꽃집이 있었거든요. 그곳을 지날 때마다 한 번쯤 꽃집에서 일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요. 어느 날 트위터에서 “제발 고백할 때 꽃 선물하지 말라”는 트윗을 보게 된 거죠(웃음). 요즘 ‘고백으로 혼내주기’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는 그 말을 맨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어요. 이 소설은 좋아한다는 고백도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시작하게 된 이야기였죠. 사실 제 소설에 나온 남자들은 모두 육식남이었던 것 같아요. 마초적이고 학습된 남성성이 있죠. 남자라면 으레 먼저 고백해야 하고, 완벽한 밀 플랜을 짜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요즘은 ‘초식남’이 대세라고 하는데 저는 그걸 뛰어넘어서 식물의 상태로 있는 게 제일 안전하고 맞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식물의 방식이요?

육식동물이 목표를 정하고, 사냥하는 방식이라면 식물은 다르잖아요. 묵묵히 기다리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벌, 나비, 바람 같은 걸 통해서 번식하고요. 지금의 남성성은 식물과 같은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주인공을 꽃집 주인으로 설정했어요. 



세 개의 단편 모두 연애의 뒷면, 실패한 연애담을 다루고 있어요. 작가님의 지난 연애들은 어땠나요?

황지우 시인의 시 ‘뼈아픈 후회’ 중에 이런 구절이 있죠.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웃음).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저도 자기중심적이고 미숙한 연애를 많이 했어요. 나만의 연애 플롯을 설정해 놓고, 상대가 거기에 맞지 않으면 인연이 아니라고 단정하곤 했죠. 상대방을 사랑한 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있는 나의 몰입 상태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책 말미에 실린 에세이에서 “쓰고 싶은 게 있다면 역시 연애뿐이다”라고 했어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당사자성이 있는 소설만 쓰거든요. 『러브플랜트』에 실린 세 단편도 ‘30대 중반의 이성애자 남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나온 발화였어요. 저는 역시 연애 이야기가 제일 재밌어요. 요즘은 이성애자 남성이 주인공인 연애 이야기가 드물기도 하고요. 연애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관계’죠. 저는 타인과의 관계가 늘 어려운 사람이라서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쓰고 싶어요.

출간을 앞두고 버킷리스트를 쓰셨다고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첫 번째는 김연수 작가님, 황정은 작가님, 강경석 평론가님께 성덕의 느낌으로 책을 보내드리는 거였어요. 그래서 출간되자마자 세 분께 메일을 보냈는데 모두 흔쾌히 받아주셨어요. 다음으로 인터넷서점 판매지수 5천 달성하기, 2쇄 찍기, ‘문장의 소리’ 팟캐스트 출연하기, 마지막으로 <채널예스> 인터뷰가 있었습니다(웃음).

마지막 항목은 급조된 거 아닌가요?(웃음)

진심이고요. 사실 <채널예스> 인터뷰를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작가들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번 책이 아니더라도 첫 정식 소설집이 나오면 꼭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찍 이루어지다니, 영광입니다(웃음).

남은 버킷리스트 중 반드시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요?

2쇄 찍기! 출간 전에는 몰랐는데, 2쇄 찍는 게 정말 어려워요. 여러분, 꽃피는 봄에 『러브플랜트』를 읽어주세요. 연애세포가 되살아날 거예요.

달달한 연애소설이라고 하기엔 뒷맛이 씁쓸한 걸요?

분명 초콜릿인데요. 카카오 100% 초콜릿입니다(웃음).



*윤치규

2021년 <서울신문> 및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데뷔 후 현대문학, 악스트, 문장 웹진 등 문예지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재능보다 열정으로 쓰는 편. 사회화된 INTP.




러브 플랜트
러브 플랜트
윤치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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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들개이빨 “먹는 얘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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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먹는 존재>의 작가 ‘들개이빨’의 첫 에세이집 『나의 먹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꿔보’일 것이다. 의미가 아리송하면서도 귀여운 이 단어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준말.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꿔보라고 규정하며 “멋짐을 뽐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첫 번째 전략은 바로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하는 것. 음식을 주제로 이보다 더 웃긴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작가가 즐겨 먹는 12가지 식재료에 담긴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저절로 꿔보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 

데뷔 후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하시는 거죠? 출판사의 요청인가요, 작가님의 용기인가요?

둘 다예요(웃음).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치열하고 어려운 작업이잖아요. 여기서 작가의 마지막 역할이 있다면 최전방에 나가 열심히 책을 홍보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제약이 생기더라고요. 또 마흔 살이 넘으니 귓가에 저승사자 숨결이 들리는 것 같아요(웃음). 주변에 여러 친구, 지인들이 아프고 불시에 세상을 떠나는 일들을 여러 차례 겪다 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동안 두려워했던 것들을 깨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책을 받아본 소감이 어때요? 

머릿속에 있던 막연한 그림이 부피와 질감을 가진 물체로 탄생하는 감동은 만화 단행본과 비슷하지만, 에세이집이 훨씬 더 감격스러운 것 같아요. 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 선 채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었어요. ‘이게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을 만큼 몰입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퇴고를 많이 했는데도 여전히 고칠 게 보인다는 건 절망스러웠지만요(웃음).

꿔보라는 화자를 내세워 먹고 사는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드는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18쪽)”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꿔보(꿔다놓은 보릿자루)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떠올렸나요? 

평생 함께한 자아였어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말 한 마디 못하고 돌아오는 답답한 날이 많았거든요. 이 성격을 타개해보려고 없는 사교력을 짜내서 활발한 연기를 하거나, 개그를 치려고 노력하다가 처참한 결과를 얻었죠(웃음). 그러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꿔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살았어요. 자연스럽게 그 자아가 글 속에서 ‘변사’ 혹은 ‘나레이터’의 역할을 하게된 것 같아요.



자신이 꿔보인지 알아보는 ‘꿔보 테스트’도 흥미로웠어요. 각 항목에 체크를 하다 보니, 꿔보가 되는 게 결코 쉽지 않더라고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꿔보의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요즘 유행하는 MBTI를 의식하고 만들었습니다(웃음). 아무래도 기본적인 욕구가 흐릿한 사람들이 꿔보에 적합하지 않을까 싶어요. 누가 뭘 강하게 하자고 해도 큰 불만 없이 따르는 사람이요. 그런데 꿔보가 쉽게 될 수 없는 이유는 욕구가 흐릿한 사람이라 해도, 그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도 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싶다’는 것도 욕구잖아요. 사실 저도 꿔보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작가님도 통과하지 못했다니, 반전인데요. 

저도 언젠가는 남들이 나를 알아봐 줄 거라는 욕망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나와 인터뷰도 하는 거고요. 진정한 꿔보는 득도한 종교인쯤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얼굴 가득 평온함을 품고 계신 스님이나 수녀님들을 길가에서 보면 ‘저 분들이 꿔보가 아닐까’ 생각해요. 옷도 약간 보릿자루 느낌이 나고(웃음).

책을 읽으면서 어디까지가 픽션일지 궁금했어요. 매일 사람이 없는 무덤가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채식주의자인 짝사랑남에게 거절당한 후 그가 좋아하는 반려동물의 그로테스크한 간식(양 뇌, 오리 혀, 캥거루 꼬리 등)을 주문해 먹으려는 이야기 등을 읽으면서요. 만화적인 요소일 거라 생각했는데요. 

다 사실입니다(웃음). 시간 순서나 이야기의 배치가 달라진 부분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은 다 제 경험이에요. 오히려 더한 내용도 많았는데 편집자님이 ‘이건 너무 심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삭제되기도 했죠. 허구의 내용을 넣어볼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왠지 양심에 찔리더라고요. 에세이니까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한 만큼 재미있고 통쾌하게 읽었어요. 그 간식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궁금해서 맛을 보긴 했는데 못 먹겠더라고요(웃음). 나머지는 동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열등감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웹툰 작가로 사는 열등감, 불안감에 대한 문장이 많았어요. 어떤 심리적 어려움을 겪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수입이 불안정하고, 심지어 점점 끊겨간다는 게 저를 옥죄는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그 와중에 주변의 동료들은 찬란하게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재능에 대한 회의가 들더라고요. 저는 원래 제 작업물에 대한 자신감이 적은 편이었는데, 이게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언젠가부터 내 작업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하지만 그걸 해결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실천하지는 않았어요. 대신 재능을 회의하기만 하는 아주 게으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소진시켰죠. 온종일 쓸모 없는 생각으로 정신력을 공회전시키다 보니 자존감이 점점 더 떨어졌어요. 제가 하는 일의 태생적인 조건 때문에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웹툰은 대중의 평가가 실시간으로 보이고, 그게 곧장 생계와 연결되는 일이죠. 

그래서 일체의 반응을 보지 않았어요. 저처럼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작품에 대한 칭찬을 받아도 불안하거든요. ‘저 관심이 언제 외면과 무관심으로 변할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하니까요. 오로지 비난만 나에 대한 진실된 평가라고 느껴졌죠. 이걸 마음에 담아두면 너무 힘드니까 어떤 반응도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는데, 그렇게 하니 또 고립감이 심해지더라고요. 특히 저는 친한 작가 동료가 하나도 없었거든요. 작품에 대한 어떤 피드백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만화라는 노동집약적인 일을 계속 하니까 언젠가부터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일의 의미가 뭐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괴로웠어요.

책의 헤드 카피가 ‘만화가가 제안하는 열등감을 치료하는 기적의 밥상’이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견디는 방법을 찾으셨을지 궁금해요. 

임시적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무인도로 들어가서 혼자 살지 않는 한, 열등감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죠. 대신 그 감정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찾은 방법은 내 직업과 다른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거예요. 대표적인 게 ‘농사’죠. 농사일을 할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들거든요. 또 몸은 고되고 힘들지만, 내가 움직인만큼 일의 성과가 그대로 보이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이 엄청나요. 며칠 전에도 농사 짓고 왔어요(웃음). 올해는 감자를 심었어요. 



대부분 ‘식재료 헌터’로 살아요 

작가님의 힐링푸드는 무엇인가요? 

역시 빵만한 게 없죠. 저는 빵이야말로 인간 기술의 정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강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이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어떻게 하면 사람의 쾌락을 최대치로 만들까’만 생각해서 나온 맛인 것 같아요. 특히 디저트는 모양이 너무 아름답죠. 형편없이 망가질 게 예정된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정말 호화스럽게 느껴져요. 빵을 볼 때면 가끔 ‘사치품을 소비하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음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데요. 평소 음식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인가요? 

밥 먹으면서 다음 끼니를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이에요(웃음). 폭식을 할 때는 다음 끼니를 기대했고, 절식을 할 때는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다음 끼니는 어떻게하면 적게 먹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죠. 음식에 대한 생각을 매일, 매 순간 하는 것 같아요.

트위터의 소개글도 ‘식재료헌터’예요. 

저는 일하지 않는 시간의 대부분은 ‘식재료헌터’라는 정체성으로 사는 것 같아요(웃음). 아보카도 싸게 파는 곳 없는지 찾아다니고, 재래시장을 절대로 지나치지 못하죠. 도서관을 가는 길에 재래시장이나 농산물을 파는 마트가 보이면 반드시 그쪽으로 꺾어서 한참 구경을 해야 하고요. 동네에 새로운 중저가 마트가 생기면 얼른 달려가서 세일할 때 식재료를 잔뜩 사와요. 그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에요. 저는 먹는 얘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작가님께 음식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저에게 음식은 ‘쾌락, 형벌, 죄악’이에요. 음식은 가만히 앉아서 입에 넣었을 뿐인데 확실한 행복이 느껴지잖아요. 혼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요. 이만큼 편리한 쾌락은 없는 것 같아요. 반면 이게 무시무시한 형벌처럼 느껴질 때도 많아요. 맛있는 음식을 계속 먹으면 체중 증가나, 건강 악화 등의 대가가 반드시 따라오잖아요. 늘 노심초사하며 그 대가를 신경 써야 하는 게 굉장한 굴레죠. 

또 결국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사실 다른 누군가를 죽여서 만든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는 거대한 죄악이라고도 할 수 있죠. 요즘 대체육이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고 대체 계란, 우유 등이 나온다는 소식도 들리는데요. ‘드디어 인류가 과학기술로 이 카르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에게 가장 유용한 식재료가 있다면요. 

계란이요. 제일 싸고,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단백질이라서 좋아요. 고기를 조리하면 반드시 기름이나 핏물을 닦아야 하는 등 귀찮은 일거리가 생기는데, 계란은 삶아서 껍질만 까면 남김없이 먹을 수 있죠. 유제품 중에서는 치즈를 제일 좋아해요. 치즈는 한국인에게 제2의 김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식에 곁들이면 무엇이든 다 맛있어지잖아요. 지방 중에서는 견과류를 자주 먹는데, 집어먹기만 하면 된다는 미덕이 있죠. 특히 캐슈넛을 너무 좋아해서 만약 제가 나라를 만들면 법정 화폐는 무조건 캐슈넛으로 할 거예요(웃음). 물물교환을 할 때 사람들이 저에게 모두 캐슈넛을 줬으면 좋겠어요.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이 “이만하면 엄청 복 받은 인생이네요(215쪽)”였습니다. 글을 쓰면서 달라진 생각이 있을까요? 

열등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글을 쓰다 보니 제가 열등감을 느낄 처지가 아니더라고요. 다음 끼니는 뭘 먹을까 고민하지, 굶주리는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는 기회도 있고요. 사실 글 쓰는 게 굉장히 고된 작업이었는데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싶어요.



*들개이빨

구석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펴낸 책으로 『먹는 존재』 시리즈와 『족하』, 『홍녀』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방황하다 어영부영 고시촌에 흘러들어 갔습니다. 큰 점수 차로 연거푸 시험에 낙방하고 고시촌을 떠나 방송국과 사교육 업계를 전전한 끝에 인터넷 폐인이 되었습니다. 블로그 및 익명게시판 곳곳에 뻘글과 낙서를 올리며 현실 도피를 하던 중 불현듯, 진지하게 만화를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언젠가는 정말로 진짜 멋진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어딘가의 구석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생각하면서요."




나의 먹이
나의 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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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영화감독 “ 20년 동안의 기록, 그리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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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를 20년 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 영화와 ‘내’가 함께한 시간을 기쁘게 겹쳐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아끼는 마음이 모여, 아카이빙북이 발간됐다. 이번 책에는 원본 시나리오, 스토리보드, 스틸 컷 등 귀중한 자료와 함께, 권김현영, 강유가람, 복길 등 영화를 사랑한 필진들의 칼럼이 수록됐다. 태희, 혜주, 지영, 비류, 온조 그리고 고양이 티티의 안부를 물으며, 정재은 감독과 영화와 함께한 시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20년의 기록이 모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2021년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20년 만에 관객을 만났고, 올해 크라우드펀딩으로 아카이빙북이 발간됐습니다. 감독님에게도 각별한 일이었을 것 같아요.

영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어요. 하나는 필름 영화를 디지털 리마스터링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사적인 아카이브 자료를 관객들에게 전하는 일이었죠. 이번 아카이브북에는 영화 자료뿐만 아니라 영화를 본 사람들의 글도 폭넓게 실려 있어서 20주년에 걸맞은 책이 된 것 같아요. 제게도 굉장히 뜻깊은 작업이었죠.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관객도 변화했을 것 같아요. 어떤 차이를 실감하시나요?

개봉 당시에는 관객 집계가 디지털화되지 않아서, 주 관객층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어요. 개별 관객의 반응을 보면서 체감한 정도였는데, 의외로 40대 남성들이 피드백을 보내왔어요. 남성 관객들은 직장에서 젊은 여성 사원들을 본 경험을 떠올린 것 같아요. 영화를 통해서 일터의 여성들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 거죠. 지금 관객들은 굉장히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변했는지 20년의 시간을 의식하면서요.

“왜 소녀들이 영화의 주인공이면 안 된다는 건가”(39쪽)라는 질문에서 시나리오를 시작하셨다고요. 

시나리오를 쓸 무렵만 해도, 젊은 세대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지 않았고, 나오더라도 폭력과 타락에 빠진 모습만 부각됐어요. 그런 이미지가 어른의 시선 같아서, 당사자의 입장에서 현실의 젊은이를 그리겠다고 결심했어요. 단순히 소녀가 나온다는 것보다는 어떤 소녀를 다루느냐가 중요했죠. 현실에 직접 부딪치며 성실하게 미래를 고민하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 그게 가장 큰 목표였어요.

배두나 배우가 직전에 출연한 작품이 영화 <청춘>이었죠. 파격성이 강조된 청춘 영화와 달리, 평범한 스무살의 모습을 보여준 <고양이를 부탁해>는 배우에게도 새로운 환경이었을 것 같아요. 

당시 배우들이 어려서, 영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시나리오를 보기에는 어려웠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동안 출연한 영화가 본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생각은 했을 것 같아요. <고양이를 부탁해>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 같으니까 편안하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나리오에 살아있는 이야기

원본 시나리오가 실려 있어, 영화와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영화에는 편집됐지만 시나리오에만 살아있는 디테일들이 있더라고요.

시나리오에 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전부 영화로 담아낼 수는 없었어요. 이건 러닝타임이 한정된 영화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새로운 디테일을 발견하는 건 굉장히 좋은 일 같아요. 영화에 드러나지 않은 미묘한 관계나 뉘앙스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아카이브북을 만들면서 원본 시나리오를 충실히 싣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영화를 본 관객들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스무살 여성들의 우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한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미묘하게 변하는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부분에 신경쓰셨나요?

이 영화는 관계 속에서 인물들이 지닌 여러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혼자 있을 때, 가족과 있을 때, 친구들과 있을 때, 사회생활을 할 때 개인이 보이는 모습은 모두 다르잖아요. 친구들이라고 해서 고민을 다 털어놓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있을 때만 보이는 모습도 있죠. 모든 인간이 그런 입체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배두나 배우는 혼자 있는 장면에서는 굉장히 집중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친구들과 있을 때는 편안한 느낌으로 연기했어요. 그게 태희라는 인물에 대한 배우의 해석이었죠.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태희(배두나 분)의 모습이 다시 보였어요.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야!” 하는 태희의 대사가 인상적인데요. 여성이 일상적인 폭력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지금, 이 말은 더욱 유효하게 들려요.

시나리오를 쓸 때, 제가 폭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시나리오에서 태희의 가족을 비가시적인 폭력의 세계로 설정한 건 맞아요. 태희의 집은 찜질방 사업에 성공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죠. 아버지가 태희에게 전통 한복을 입으라고 강요한다거나,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자 가족들이 비웃는 모습, 커다란 가게 간판을 올릴 때 아버지를 바라보는 태희의 회의적인 표정. 드러내 놓고 폭력적이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 태희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정체성을 형성한 것 같아요. 그런 캐릭터성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강압적으로 결정하는 아버지에게 소심하게 반항하는 방식으로 표현된 거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롭게 와닿은 인물은 혜주(이요원 분)였어요. 혜주는 서울의 증권 회사에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데요.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의 몸을 의식하고 자기계발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감이 되는 캐릭터였어요.

원래 혜주는 얄밉다는 평가를 받는 캐릭터였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혜주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죠. 20년이 흐른 지금에야 혜주는 폭넓게 공감을 받는 캐릭터가 된 것 같아요. 사실 혜주는 다양한 면을 갖고 있는 친구예요.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기도 하고, 부모의 이혼을 겪고 친구와 멀어지면서 실존적인 자각을 하기도 하죠. 시나리오에는 언니의 낙태를 곁에서 지켜보고, 미용에 관심을 갖는 등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당시에는 그 아이디어가 좀 빨랐던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가 됐죠.


플레인아카이브 제공

동물과 인간이 함께

현장을 찍은 스틸 컷을 보며, 영화에 다 담기지 않은 장면들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전 과정을 함께한 감독님도 스틸 컷이 공간과 인물에 대해 “나와는 또 다른 해석을 시각적으로 내놓고 있다”(219쪽)고 느끼셨다고요. 

영화의 스틸 컷은 포토그래퍼가 제3의 시선으로 현장을 찍은 결과물이라, 감독의 시선과는 다르다는 걸 전제로 해요. 물론 영화를 촬영한 다음 카메라가 있었던 위치에서 똑같이 스틸 컷을 남기는 경우도 많았지만요. 그런데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화와 스틸 컷 모두 필름으로 찍었기 때문에, 노출값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굉장히 달라졌죠. 이번에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하면서 디테일이 선명하게 보이는 장점이 있었지만, 필름의 거친 입자가 주는 느낌이 사라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스틸 컷에는 그런 질감이 남아 있었고, 저와는 다른 시선으로 인물이 담겨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20년 간 고양이가 감독님의 인생에 차지하는 의미도 커졌다고요. 당시만 해도 고양이가 등장하는 영화는 많지 않았는데, 촬영 현장에서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스태프들의 최대 미션이 ‘고양이 찾기’였어요.(웃음) 보통 길고양이는 겨울을 넘기고 이른 봄에 새끼를 낳는데, 촬영을 한겨울에 시작해서 어린 고양이를 구하기가 어려웠죠. 고양이를 등장시킨 건, 아마 어린시절 고양이를 키웠던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고양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꾸준히 스크린에 동물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해왔어요. 고양이뿐만 아니라 개가 등장할 때도 있었죠. 영화를 통해 인간 외의 존재가 공존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관객에게도 중요한 일이라는 신념이 있어요.

도시에서의 인간관계도 20년 동안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지금이라면 ‘단체 채팅’을 하겠지만, 영화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전화를 걸더라고요. 다시 촬영한다면 영화의 모습이 많이 달라질까요?

그간 인간관계의 모습도 많은 변화를 겪었죠. 타인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민감해졌고, 친구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니까요. 그게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작년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개봉했을 때, 한 관객의 리뷰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태희가 지영의 집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장면을 보고, 자신은 그렇게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거예요. 만약 지금 영화를 만든다면 분명 다른 방식으로 찍게 되겠죠. 문자메시지나 전화 대신, ‘단체 채팅방’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요. 오히려 저는 과거로 가서 아주 친밀한 친구 관계를 그려보고 싶기도 해요. 현재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어땠는지 살펴보고 싶은 거죠.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끝으로 도시 다큐멘터리 3부작이 마무리됐는데요. 차기작이 궁금합니다.

사극을 만들 계획이에요. 그간 현대의 도시에 관심이 많았는데, 문득 과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사극은 현대인의 주관을 거쳐 만들어지기에, 판타지가 될 수밖에 없거든요. 모든 디테일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죠. 옛 사람들의 관계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상상하는 것. 요즘에는 그런 일들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플레인아카이브 제공



*정재은

고양이, 도시, 건축에 관심 많은 영화 감독. 2001년 <고양이를 부탁해>로 장편 감독으로 데뷔했다. <고양이들의 아파트> 외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활발하게 만들고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아카이브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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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소설가 김지연, 실컷 울고 나면 도움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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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많은 순간들을 태연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내놓는 일도, 슬픈 일 앞에서 드러내놓고 펑펑 울어버리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 순간마다 많은 마음들이 층층이 쌓인 것일 수도 있겠다고, 김지연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으며 생각했다. 작가는 8편의 소설을 쓰며 인물들을 실컷 울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의 바람과 달리 인물들은 쉽게 울지 않지만, 복잡하고 섬세한 마음의 결은 소설의 장면마다 살아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마음들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큐큐 퀴어 단편선에 실린 「사랑하는 일」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요. “이렇게 웃기고 발랄한 퀴어 소설이라니 좋다.”는 평이 많았죠. 

혹시라도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고 이번 소설집을 보고 실망하실까 봐 걱정도 됐어요. 평소 스타일과 다르게 ‘웃기는 이야기를 써보자’ 하고 떠올린 소설이었거든요. 쓰는 내내 즐거웠어요. 

『마음에 없는 소리』는 복잡한 마음들을 떠올리게 되는 소설집이었어요. 인물들은 태연한 표정을 짓지만 마음에는 많은 말을 담고 있고요.

제가 좀 그래요. 우유부단해서 어제는 이게 좋았다가 다음 날엔 다른 것이 좋을 때가 많거든요.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변한 건데,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아니 그때는 그렇게 말해놓고 왜 딴소리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좋아한다고 말해도 백프로는 아닐 수 있고, 살다 보면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변하는 마음에 대해서 써보고 싶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이 딱 저와 작가님 또래더라고요. ‘30대’라는 시기는 참 애매한 것 같아요.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한데, 그렇다고 사회가 기대하는 ‘청년’의 이미지에 딱 맞는 것도 아니죠.

정확히 말하면 저보다 조금 어린 친구들인데요. 제가 소설을 본격적으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무렵의 나이예요. 당시에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경력도 애매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았거나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그 친구들이라고 단단한 자리를 갖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제 눈에는 확신을 갖고 삶을 꾸려가는 것처럼 보였죠. 당시의 심란한 마음이 많이 반영된 것 같아요.

소설들을 끝까지 읽으면 어떤 장면들이 또렷이 남는데요.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쓰는지 궁금했어요. 

구조를 철저히 정해놓는 작가님도 있겠지만, 저는 처음, 중간, 끝 정도만 느슨하게 떠올리고는 그 안의 장면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써요.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기는 하지만, 쓸 때는 즉흥적으로 쓰는 편이고 갑자기 떠올린 장면을 집어넣기도 해요.


고향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소설의 화자들은 서울에 살다가 다시 고향을 찾아요.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울의 삶에 지쳐서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가죠. 

질문에 답하다 보니 새삼 제 경험이 많이 녹아들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고향인 거제에 살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거든요. 그러다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가 소설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다시 올라왔어요. 저뿐만 아니라 주변에 타향살이를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만나면 서울 생활이 녹록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죠.

서울과 고향을 오간 경험이 반영된 것이었군요. 

오히려 서울을 잘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른 작가님들이 서울을 배경으로 하면 자연스러운데, 제가 쓰면 어쩐지 서울에 처음 온 사람이 유명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이야기 같거든요. 그래서 그냥 잘 아는 장소를 쓰게 돼요. 고향을 배경으로 할 때 재미있기도 하고요.

「굴 드라이브」는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삼촌의 말을 듣고 ‘내’가 고향에 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고향은 한때 조선업으로 흥했지만 지금은 쇠락해가는 바닷가 마을이죠. ‘내’가 굴 양식장의 배달을 돕게 되면서, 학창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반장’을 다시 만나는데요. 처음 쓴 버전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고요.

초고에서는 반장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었어요. 옛 남자친구를 만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썼는데 전개가 뻔하다는 말을 들었죠. 그럼 반장과 ‘나’의 에피소드를 써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나’와 반장과의 관계가 재밌었어요. 반장이 고등학교 시절 ‘나’를 미워했던 일에 대해 두 번이나 사과하는데 ‘나’는 끝까지 용서해주지 않죠.

저도 마지막에는 용서할 줄 알았어요.(웃음) 그런데 가끔 제 의도와 달리 인물들의 대사가 나올 때가 있거든요. 이쯤 되면 용서해줘야지 했는데 “아니! 용서 못하겠는데.” 하는 대사가 나온 거예요. 그래, 그냥 용서를 안 하는 것으로 가자. 그렇게 마무리 지었죠.

대화 장면이 생생해요. 특히 말다툼하는 장면이 현실감 넘쳐서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용서 안 해줄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싫어해.” “미친. 진짜” 친구랑 싸울 때 진심으로 나오는 반응 같아요.

쓰다 보면 인물의 대사들이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그걸 받아서 쓰는 느낌이에요. 주변 친구들 말투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본인들은 잘 모를 거예요. 말다툼 장면은 제 속에 쌓여 있는 말을 쓴 것 같아요. 입 밖에 내지는 않아도, 저녁에 누워서 ‘이 말을 했어야 하는데…’ 하는 말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은 결말에서 묘한 감정이 밀려오는 소설이었어요. 나체로 바다에 뛰어들어보고 싶은 ‘내’가 여자친구 진영과 함께 남해안의 마을로 떠나죠. 그런데 결말에서 이 일들은 과거의 추억이 돼요. 현재인 듯 미래인 듯 여운을 남기는 방식이 좋았어요. 

예전 여자친구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마지막에 넣고 싶었어요. 헤어진 사이니까 너무 좋았다고 쓰는 것도 이상하죠. 그래도 헤어졌다고 해서 좋았던 기억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좋았던 버전으로 써봤어요. 바닷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 해변의 이미지를 살리고 싶었고, 파도가 밀려오고 떠나가는 것처럼 리듬감이 있었으면 했죠. 쓰고 나니까 왠지 자신이 없어져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마지막 장면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 안심했어요.

소설을 덮은 후 “들러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들”(158쪽)의 이미지가 끝까지 남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의 모래처럼요. 

과거에 일어난 일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면 결과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 잊은 것 같다가도, 선택을 내릴 때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 타인의 말이나 행동들이요. 그런 생각이 소설에 들어온 것 같아요.



남김없이 잘 울고 싶다

「작정기」는 여행지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설이죠. “원래 다케오에 가려고 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원진이었다.”(99쪽)는 첫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돼요. 

실제로 친구와 일본여행을 가기로 했다가 사정상 혼자 가게 된 적이 있어요. 「작정기」에 나온 장소들은 다 가본 곳이에요. 소설에 나오는 ‘녹나무’도 직접 봤고요. 원래 제가 여행을 안 가는 편이고, 딱히 소설로 연결되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다케오 여행이 처음으로 혼자 간 여행이었더라고요. 혼자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면서 소설이 된 게 아닐까 싶어요.

소설의 표면에 사연의 배경이나 들끓는 감정이 안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 원진이 왜 세상을 떠나는지, 주차장에 세워진 차가 왜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오는지 별로 해명하지 않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나 고민이 됐어요. 친구가 죽은 건 큰 사건인데 짧게 언급하기만 하고 넘어가니까요. 그런데 그 내력을 자세히 쓰는 게 이 소설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차가 왜 없어졌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유를 채워 넣는 것도 이상한 일 같아서 안 쓰는 걸 선택했죠.

작가의 말에서 “글쓰기란 엉엉 우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왕이면 온 힘을 다해 남김없이 잘 울고 싶다”(315쪽)고 쓰셨죠. 가장 먼저 쓴 소설인 「내가 울기 시작할 때」에서 인물들이 우는 장면을 찾아봤어요. 전부 남 앞에서 드러내놓고 우는 성격은 아니라서 뒤늦게야 우는데, 그럼에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더라고요.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때가 있잖아요. 제가 그리는 인물들에 대해 ‘다들 한번씩 크게 울게 해주고 싶다, 이렇게 힘든데 울게라도 해주자.’ 하는 기분으로 썼어요. 울어서 떨쳐버릴 수 있는 건 떨쳐버리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의 첫 소설인 「내가 울기 시작할 때」는 어쩐지 투명하게 하고 싶은 바가 드러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애착이 가는 소설이었습니다. ‘삼’과 ‘내’가 사는 현실에는 폭력과 배제가 있는데,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삶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221쪽)는 문장을 쓰실 때, 작가님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소설 속 두 사람이 암울한 커플이기는 하죠.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자살을 한 것이라고 보는 독자분들도 많았어요. ‘자살은 아니다’라고 썼지만, 분명한 이유를 밝히진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 사람들이 굉장히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생각하며 썼어요. ‘삼’은 이상한 취미를 가진 인물인데, 그 활동도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지속하는 방식이죠. ‘나’ 역시 잘하고 싶은 게 많고, 어떻게든 삶을 나아지게 하고 싶었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요.

소설을 쓰기 전에는 시도 쓰셨다고요. 

대학교 때는 시를 많이 썼어요. 졸업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일 때문에 못 쓰는 시기도 있었죠.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대학원에 가면서였어요. 당시 나이도 많았고, 한동안 고향에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근데 그 때는 고향에 있는 게 너무 싫었나 봐요.(웃음) 집에 미리 알리지 않고 대학원 시험에 합격한 후에 ‘다시 서울 가겠습니다’ 하고 무작정 상경했거든요.

『사쿠테이키(작정기)』나 『마음의 진화』 등 소설에 인용된 책의 분야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좋아하시나요?

한때 정원 디자인이라던가 과학책 같은,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 걸 좋아했어요.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을 때, 수학 문제를 푼다고 하잖아요. 이 책들도 명쾌한 설명을 해주니까 속 시원한 기분이 들었어요. 오히려 과학적인 문장이 시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요. 

책읽기 말고 다른 취미도 궁금했어요.

뜨개질을 좋아해요. 뜨개질이 봄, 여름, 가을에 열심히 떠서 겨울에 사용해야 하는 건데, 막상 겨울이 되어야 뜨개질을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떠놓고는 사용을 안 하죠. 그냥 그 과정이 즐거운 것 같아요. 게임도 좋아하는데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서 화자가 게임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소설에 조금 써먹기도 합니다.(웃음)

작가님의 첫 책은 스릴러 소설 『빨간 모자』였죠.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실 지 궁금해지는데요. 

지금도 스릴러 같은 소설을 쓰고 있어요. 스릴러 장르를 일부러 찾아볼 정도로 좋아해요. 너무 무서운 걸 보면 잠을 못 잘 때도 있지만요.(웃음) 앞으로도 『마음에 없는 소리』의 세계관과 크게 다른 소설을 쓸 것 같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고향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지방도시에서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써보고 싶네요.




*김지연

2018년 단편소설 「작정기」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제12회, 제1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
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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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전문 변호사 최유나 “이별에 집중해야 관계가 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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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란, 관계가 내포한 꽤 개연성 높은 결말일 수밖에 없다.” 숱한 이별을 지켜봐 온 이혼 전문 변호사 최유나의 말이다. 부부 뿐만 아니라 가족, 연인, 친구, 심지어 나 자신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만났기 때문에 헤어지고, 만남이 영원할 거라 생각할수록 이별은 앞당겨진다. 이러한 관계의 속성을 꿰뚫어 보았기에, 최유나 변호사는 묻는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영원한 내 삶의 반경 안에 있을 것처럼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그리고 제안한다. “끝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자주 떠올리며 살아보는 건 어떨까.” 그런 마음으로 에세이 『혼자와 함께 사이』를 썼다. 이혼 전문 변호사로서,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모았다. ‘이 책의 주제는 이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것이 자신이 만났던 의뢰인들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이야기이고,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로서 20대부터 수천 건의 이혼 사건을 맡아 진행해 온 최유나 저자는 자신의 일이 “이혼을 막기도, 돕기도 하는 것”이라 말한다. 수많은 갈등과 화해, 치유와 결별의 장면을 목격하며 관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했고, 그렇게 깨달은 바를 인스타툰 <메리지 레드>에 담았다.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이 이야기는 단행본 『우리 이만 헤어져요』로 출간됐고, 저자는 tvN <유퀴즈온더블럭>, <세바시> 등 여러 방송을 통해 온기 어린 조언을 건넸다.

 


이별에 집중해야 관계가 보이니까요

『우리 이만 헤어져요』가 나왔을 때, 예약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었죠. 이번 책도 출간된 지 얼마 안 돼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감사하죠. 제가 10년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는 점에 점수를 많이 주시는 것 같아요. 저도 에세이를 되게 좋아하는 독자라서 에세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좀 높은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에세이를 쓰는 게 부끄럽고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저한테 원하시는 게 문장의 아름다움이라든지 작품성이 아닌 것 같았어요.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아픔을 치유하는지 지켜본 사람이라는 것에 점수를 많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쓸 때는 편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내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이야기는 이런 것이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구나’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메리지 레드>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걸 알고 시작한 건 아니었고요. 연재를 하면서 사람들의 DM이나 댓글을 보면서 알게 됐어요. DM을 보내시는 분들이 부부 관계나 인간관계에서 힘든 점을 말씀하시면서 ‘저 같은 사람도 있나요?’라고 물어보세요.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 이런 걸로 상처받는 사람, 이런 걸로 부부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시거든요. 자신과 비슷한 케이스가 있는지 저한테 듣고 싶어 하시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으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똑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본 사람이라 해도 갑자기 하나 되듯 공감대를 형성하잖아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책에도 보편적인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게 됐어요.

첫 번째 에세이인 만큼 작가님께 의미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쓰시는 동안에는 어떠셨나요? 

이 책을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면 너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할 만큼, 저의 10년을 돌이켜 보게 해줬고요. 스스로의 성장기를 쓰는 느낌이었어요. 책에서 의뢰인 분들을 통해서 제가 느끼고 깨달은 바를 썼는데, 의뢰인 분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담겨 있기도 하지만 제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의뢰인 분들이 사건을 통해서 홀로서기를 하고 성장해 가는 기간에 저도 그 분들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 분들이 저에게 준 힘인 것 같아요. 책을 쓰면서 그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제 인생을 돌아보면서 또 한 챕터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쓰는 시간도 좋았지만 지금 이 시간도 되게 좋더라고요. 이 책을 행복하게 읽어주신 분들의 후기를 많이 듣거든요. DM을 통해서 받기도 하고 지인들이 카톡을 보내기도 해요.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주 가까이에서 본 가족이나 친구들도 이 책에 그냥 제가 담겨있다고 이야기를 해줘서, 지금 이 시간도 되게 좋고 되게 재밌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혼자와 함께 사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에세이라는 건 제 자신을 반영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의 성장기를 담은 책이에요. 제 성장기에 가장 큰 획은 그은 것이 아버지, 아버지와의 이별이고요. 또 의뢰인들의 이별을 지켜본 것이에요. 제가 20대 때부터 이혼 소송을 하면서 의뢰인들과의 관계에서도 힘듦이 있었는데, 그렇게 중압감을 느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정말 힘들었지만, 당시에 감당이 안 되던 것들을 (아버지와의) 이별을 통해서 뛰어넘는 경험을 했어요. 그게 고통이 주는 힘인 것 같더라고요. 

그걸 통해서 성장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 거고요. 이 책의 주제를 하나로 말하자면 ‘이별’인 거죠. 가족과의 이별, 부부 간의 이별, 연인과의 이별, 친구와의 이별에 대해 썼어요. 이별에 집중해야 관계가 보이니까요. 이별은 관계가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결과치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별에서 소급해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같이 잘 서있을 수 있으려면 혼자서도 잘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책 전반에 깔려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트라우마, 피해의식, 자존감 같은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다 그렇지만, 그건 저의 이야기이고 의뢰인 분들의 이야기이고 모두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트라우마, 피해 의식, 결핍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관계라는 게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친밀해질수록 자신의 밑바닥이 점점 드러나잖아요. 그래서 친해질수록 어떤 때에는 더 가식적으로 되는 것 같은 경험도 많이 해요. 

책에서 제가 제일 친한 친구 두 명과 헤어지게 된 이야기를 썼는데,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이야기였어요. 친한 친구일수록 제가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더라고요. 배우자한테도 그랬고요. 나는 혼자서 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는 사람이라는, 슈퍼우먼 코스프레를 계속하는 거죠. 이런 제 자신을 보면서 ‘나도 어딘가 좀 아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언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출산 직후에 직방으로 깨달은 것 같아요. 솔직히 출산 직후에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저는 혼자 해내려고 했었나 봐요. 나한테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강박이 있구나, 그런 부분에 결핍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를 오랫동안 되돌아보게 된 시기였어요.

남편 분은 어떠셨나요?

아마 남편도 비슷했을 거예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강박이나 결핍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저도 예민한 시기였는데 겹친 거죠. 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면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으니까 같이 드러나요. 그런데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게 헤어지거든요. 서로 타이밍이라도 다르면 한 명이 품어주면 되는데, 항상 그 시기가 같이 오는 거죠. 사업이 힘들 때, 집안일이 힘들 때, 부모님이 아프시거나 어떤 이벤트가 일어나면, 서로의 밑바닥을 함께 드러내면서 막장까지 치닫게 되고 헤어지자고 말하게 돼요. 

그래서 책에서 한 이야기가, 트라우마나 피해의식이나 결핍 같은 걸 자꾸 숨기려고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내가 어떤 걸 갖고 있는지 파악하고 상대방이 가진 것도 파악해야 돼요. 그리고 진짜 인정을 하는 거죠.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러면 노력을 하고 넘어설 수가 있는데,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이별을 맞은 사람들은 미련이 남고 내가 뭘 잘못했나 계속 생각하게 돼요. 또는 무조건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해버려요. 그런데 무조건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힘들거든요. 상대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차라리 내 잘못이라는 걸 알면 다음 관계에서도 노력을 할 수가 있어요.

두 사람 모두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싸움이 커진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저도 그런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지금보다 어렸던 20대 후반에는 의뢰인 분들의 소장을 보면서 ‘진짜 이런 이유로 이혼을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가치 판단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소장에 나왔던 대사들을 어느 순간 제가 읊고 있고 제 남편이 읊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이건 인류 공통의 일이구나’,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시작이구나’ 싶었어요. 

결국 그걸 이겨내고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 그게 친밀한 관계에서 느끼는 고통이 주는 성장의 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것은 선택이지, 더 중요한 건 ‘그걸 통해서 자신이 발전했느냐 후회했느냐’인 것 같아요. 자신이 ‘이건 정말 해야 하는 이별이었어’라고 생각하고 의존적이었던 사람이 홀로서기를 하고 혼자임을 즐기게 될 때, 그건 정말 건강한 이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말하는 슬픈 이별은 자존심 때문에, 치졸한 자기 한계를 이겨내지 못해서 결국 상대방 탓으로 돌리고 나중에 가서야 자신의 잘못이었음을 깨닫는 이별이에요. 그런 이별은 안타깝더라고요. 



결혼하더니 사람이 변했다?

‘노력의 바통 터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내로 유지되는 관계는 위태롭다는 이야기였죠. 

사실 이혼하시는 분들을 많이 욕하시거든요. 제가 <유퀴즈온더블록>에 나가서 이별은 쉬운 일이 아니고 이혼하시는 분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는데 ‘존경’이라는 단어 때문에 진짜 욕을 많이 먹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분들을 직접 봤기 때문에 존경할 수 있는 거거든요. 얼마나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보니까 그 단어를 쓴 거예요. 사람들의 편견에서는 ‘자식도 있는데 노력도 안하고 힘들다고 그냥 이혼해 버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표현하면 이혼을 조장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저도 자식을 둘 낳아서 키우는 엄마이지만, 이혼은 진짜 웬만해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나서 결정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고요.

일방적으로 계속 노력하시다가 이혼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조금 극단적인 예이지만, 20~30년간 폭행을 당해 오신 어머님들이 진짜 많거든요. 저는 이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면 폭행당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을 거예요. 가정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사각지대예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신고도 잘 안 하고, 내 자식의 엄마이고 아빠이기 때문에 전과가 남는 게 싫어서 참고 넘어가요. 그리고 대부분은 희망을 갖고 사시죠. 

좋아질 거다, 지금은 힘든 일이 있어서 그렇지 지나가면 좋아질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20~30년을 참아 오시다가 자식들 손에 이끌려서 이혼 하러 오신 어머님들이 많으세요. 옛날에는 가부장적인 문화 때문에 폭력이 정당화된 경우도 있었고요.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끊임없이 계속 노력을 해오셨어요. 예를 들면, 남편한테 폭행을 당하는데도 칠첩반상을 차려놓으시는 거죠. 세대 차이일 수 있는데, 그 분들은 그게 당연한 거예요.

그럴 때 ‘노력의 바통’을 상대에게 넘겨주라고 하시겠네요. 

노력을 멈춰라, 가정을 지키고 싶으시면 멈추셔야 된다, 말씀을 드리죠. 가정을 깨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가정을 지키려면 본인도 달라지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자식들이 해도 바뀌지 않으시다가 저한테 오시면 좀 되기 시작해요. 지금 배우자가 하는 행동이 객관적으로 범죄 행위가 된다는 걸 인지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수십 년 동안 자신한테 돌리던 화살이 드디어 상대방을 향하는 거예요.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넘어가면서까지 상대방한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관계는 진짜 좋은 관계라고 보기 어려워요. 만나면 항상 웃고 좋은 이야기만 하니까 사람들이 나를 찾고 인기가 많지만, 자꾸만 혼자 있고 싶거든요.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진돼 버리니까. 그건 좋은 관계가 아니에요. 그런 걸 볼 때 노력을 좀 멈추시라고 말씀드리죠.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기 전에, 꼭 맞춰보거나 확인해 봐야 할 것’으로 ‘욕망’을 꼽으셨습니다. 그런데 결혼 전에 서로의 욕망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맞아요. 그때만 해도 호르몬이 상대방을 원하니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척 하죠. 거의 다 그러더라고요. 저희 남편이 저를 그런 식으로 속였거든요. (웃음) 결혼하신 분들은 다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부부가 다른 건 다 맞출 수 있더라고요. 생활 습관이나 식습관, 온도 차이 때문에 창문을 열고 닫고 하는 것도 어떻게든 해결이 돼요. 그런데 욕망이 너무 다르면 결국 헤어지시는 걸 많이 봐요. 제가 헤어지는 사람들만 보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욕망은 갖고 태어나는 거라 잘 안 바뀌는 것 같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누군가와 함께할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관계 지향적인 욕망이 진짜 강한 사람이죠. 또 어떤 사람은 일적인 성취에 완전히 매여 있잖아요.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서도 멈춰지지 않고. 그런 두 사람이 만났을 때가 되게 힘들거든요. 타협이 되는 성격이 있고, 자신의 욕망을 상대방한테 강요하는 성격이 있는데, 그 성격 차이 때문에 결국은 헤어져요. 욕망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다르다는 것 자체보다 중요한 건 해결 가능한 것이냐 하는 거예요. 얼마간은 서로 양보할 수 있는지, 그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남편 분께 속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웃음) 책에서 말씀하신 ‘돌변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어요. ‘연애할 때는 안 그러더니, 결혼하니까 사람이 변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작가님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변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 또한 그걸 알아채는 데 되게 오래 걸렸어요. 대부분 사랑이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목적과 상황이 바뀐 것 같아요. 결혼 전에는 목적이 하나더라고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이 사람을 (나의) 가족으로 묶고 싶은 거죠. 그래서 ‘나는 너랑 비슷한 사람이야’ 하면서 상대에게 맞추기 위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아요. 그러다 결혼을 하고 한 울타리에 들어오면 목적이 바뀌잖아요.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더 장기 플랜이 시작되는 거예요. 

물론 애정이 식고 마음이 변해서 결혼 생활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도 일부 있겠죠.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들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80~90%는 더 잘 살기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건데 표현이 부족해서 그런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데 길을 잃어버리는 거죠. ‘우리가 저기로 가고 있어’라는 걸 꾸준히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결국 다른 길로 가요.

“관계는 그냥 두면 자연히 멀어지다 소멸되는 것이 정상이다”라는 문장이 떠오르네요. 

끊임없이 이야기해주지 않고 그냥 두면 자연 소멸해요. 그러니까 부부는 헤어져요. 길이 달라지는 거죠. 그런데 그걸 이혼하고 3~4년 있다가 알게 되는 분들이 있어요. 상대의 부재를 몇 년간 겪으면서 (그동안) 상대가 뭘 하고 있었는지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그때 깨닫고 후회해요. 



응원받아야 할 이별, 생각보다 많아요

“노력 끝의 이별은 응원 받아야 마땅하다”고 쓰셨는데요. 이 말에 위로 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부뿐만 아니라, 관계를 정리하시는 분들은 다 죄책감 같은 걸 가지고 있거든요. 내가 조금 더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노력 끝의 이별’이라는 거거든요. 양쪽 다 그런 생각을 했다면 이별이라는 결과를 얻지 않았을 테니까요. 한쪽만 그렇게 생각하는 관계라면, 거기에서는 더 노력을 했어도 안 됐을 거예요. 그런데 계속 노력하시던 분들은 여전히 후회하고 반성하고 더 노력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원래 노력 안 하시던 분들은 관계가 끝나고도 ‘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노력 끝의 이별은 응원 받아야 마땅하다’고 쓴 거예요. 정말 노력하다가 이별하러 오신 분들은 진짜 응원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말도 안 되는, 안 해도 되는 노력을 해 오신 분들도 계시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이별을 결정하시는 분도 있어요. 다 너무 멋있는 이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을 보면 응원을 많이 해드려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죠. 가족들이 몰려와서 이혼 부추겼다고 하시지만, 진짜 진심으로 응원하는 이별들이 많아요. 이혼을 해야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럼요. ‘이혼을 해야 살 수 있는’ 경우도 많이 있죠. 

극단적으로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정신 건강이 위협 받거나, 관계를 지속해 나갈수록 모든 병이 추가되는 사람도 있어요. 공황장애, 우울증, 조울증, 이렇게 3개는 기본으로 갖고 오시거든요. 정말 노력하셨다는 이야기죠. 노력을 안 했으면 그 병이 안 찾아왔을 텐데, 안으로 계속 삭혀서 병이 온 거니까요. 그런 진단서를 갖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 할 말이 없죠. 그저 응원하고 위로하고, 잘 하셨다고 힘내시라고 말씀드리는 것밖에는. 그런 상황에서 분리가 돼야만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분들이 계세요. 응원 받아야 할 이별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노력하지 않은 이혼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말씀하시잖아요.

네. 도피성 이혼이나 자존심의 승리를 위한 이혼, 그냥 상대방을 한번 밟아주기 위한 이혼... 별 종류의 이혼이 다 있죠.

‘권태’를 이유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면서요. 그런 사람들에게 일갈하셨어요. “시즌2 지루하다고 시즌3 무조건 안 보실 건가요?” “시즌3에 어떤 게 있을 줄 아시고”라는 말이었죠. (웃음)

진짜로 시즌 3, 시즌 4가 더 재밌을 때가 많은데 그냥 좀 지루하다고 중간에 하차하는 거죠. 영상이야 그래도 되지만, 자식들도 있는데 지루해서 이혼한다고 하니까, 어떻게 그걸 응원해줄 수 있겠어요. 제가 변호사이지만, 그 사람이 이혼하면 제가 돈 벌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면 표정 관리가 안 돼요. 저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이 없으면, 서로 동의만 한다면야 이별하면 그만이죠. 그걸 누가 욕했어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재미로 태어난 게 아닌데, 너무 화가 나죠. 어떤 때는 사건 수임을 거절하기도 해요. ‘이건 변호사님한테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러면서 ‘결혼하면 재밌을 줄 알았는데 아이 낳아보니까 진짜 재미없더라고요, 이게 이혼을 하지 않으면 끝이 안 나요, 그럼 제가 (가족들을) 10~20년 책임져야 되는데, 발 빼고 싶어요’라고 하는, 너무 심한 경우도 있어요. 남녀를 불문하고요. 그런 사람을 보면 분노가 차오르죠.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일단은, 제가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다 독자 분들 덕분이니까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는 변호사가 되기 전에도 누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항상 작가라고 말했을 정도로 꼭 책을 내고 싶었어요. 중고등학생 때도 혼자 글 써서 묶어서 표지까지 만들어서 책처럼 만들었었어요. 내 이름으로 책이 나온다는 것 자체로 너무 행복해 했어요. 이렇게 책을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독자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관계라는 것이 누구한테나 어렵고 혼자서 아무리 공부하고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만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스스로에게 떳떳해지는 순간에는 더 이상 이별이 두렵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순간이 올 수 있도록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인에게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최유나

20대부터 이혼 변호사로 활동하며 1,000건 이상의 이혼 소송을 진행했다. 누군가의 인생에 불현듯 닥쳐온 고통의 시기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는 것을 천직이라고 여기는, 소송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또 배우는 워킹맘. 숱한 간접 경험을 통해 느끼고 배우는 것을 공유하고 이혼 소송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김현원 작가와 함께 인스타툰 <메리지 레드>를 시작했다. 결혼 생활 전후의 모든 시기마다 가장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갈등 상황을 다루면서도 그에 대한 이혼 변호사로서의 자기 생각을 담기 위해 애썼다. tvN <유퀴즈온더블럭>을 비롯한 다양한 방송에 출연해 관계에 관한 온기 어린 조언들을 건네고 있다.



혼자와 함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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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나 저
알에이치코리아(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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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황인찬 시인 “시만의 기쁨을 아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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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스튜디오에 들어선 황인찬 시인은 창밖에 만개한 벚꽃을 보더니 “찍어도 되죠?”라고 물었다. 사진작가보다 셔터를 먼저 누른 시인. 카펫 위에도 풀썩 주저 없이 앉는 시인. 스스로를 ‘시 영업사원’이라고 칭하는 시인. 아직도 가끔 ‘문단의 아이돌’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되는 시인. 황인찬 시인과 그의 첫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을 두고 만났다.



나는 시 영업사원이다

세 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가 출간됐을 때 뵈었으니 2년 반 만이네요. 시간이 정말 빨라요. 한 달에 한 번 안부를 올리는 SNS를 보니 요즘 많이 바쁘신 듯한데, 일주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요?

들으면 실망하실 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월요일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요. 화요일에는 CBS와 국악방송 라디오 녹음, 수요일에도 대학 강의랑 라디오 녹음이 있고 목요일에는 창비 팟캐스트 〈북북서로〉 녹음을 해요. 금요일은 일부러 스케줄을 빼놓았어요. 낭독회를 하거나 일회성으로 하는 일을 하려고요. 주말에는 강의 준비나 원고를 쓰는데, 그래도 하루는 밖에 나가서 바깥 공기를 쏘이려고 해요. 

그래서 오늘 조금 신나 보이셨군요. 창비에서 새로 시작한 팟캐스트 〈북북서로〉는 매주 녹음을 하나요?

2주에 한 번 녹음하는데 게스트를 모시는 코너가 있어서 시간 맞추다 보면 한 달에 세 번쯤 녹음실에 가는 것 같아요. 김현 시인과 함께 진행해서 좋고 반가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아무래도 진행자도 게스트도 모두 글 쓰고 책 읽는 사람들이라 부담이 적어요.

주 5일 출근하는 직장인보다 한 주가 훨씬 빡빡하네요.

어차피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계속 이어질 건 아니니까요. 일단 제가 프리랜서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한데 시를 쓰는 시간이 많이 줄은 건 힘들죠. 스트레스도 받고요. 예전에는 시간을 듬성듬성 비우고 사이사이에 딴짓을 많이 했거든요. 문서 창을 켜둔 채로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 시간이 없어진 게 조금 답답한 점이긴 해요. 시 말고 다른 일은 열심히 안 하고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데 시인으로서는 조금 부족하게 살고 있기도 하죠.

왜요. 생활인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면서 나오는 시도 있을 텐데요. 

맞아요. 그런데 지금은 균형이 조금 실패한 상황이라 어떻게든 시간을 내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단독 저서로는 네 번째 책, 등단 12년 만에 드디어 산문집이 나왔어요. 그동안 발표한 글도 많았을 텐데 조금 늦게 나온 느낌이에요.

산문집을 계속 못 내고 있었던 건 한 권의 책을 쓸 만큼의 이야기가 저한테 없었어요.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시를 통해서 이미 충분히 하고 있었으니까요. 크게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은 2020년 10월부터 1년간 진행했던 〈네이버 오디오 클립-황인찬의 읽고 쓰는 삶〉 원고를 다듬어 엮은 책이에요. 방송은 100회로 마쳤고 책에는 49편의 시가 담겼으니 반 정도가 살아남은 셈입니다. 방송은 어떻게 기획됐나요?

원래 시를 연재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럼 일주일에 세 편을 써야 하는데 너무 힘든 일일뿐더러 아무도 안 들을 거 같았어요. 그렇다고 일상 이야기를 하자니 되게 까마득한 이야기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고 거기에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드렸어요.

진행은 수월했나요?

시를 정하는 게 힘들었지만 정하고 나면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가 품고 있는 삶을 생각하고 그 삶과 제 삶을 같이 두고 이야기하면 됐으니까요. 사실 지금까지의 모든 글쓰기 중에서 가장 편하게 썼어요. 애당초 글이라기보다 말이라는 생각을 하고 풀어나간 거니까요. 좀 더 쉽게 풀렸죠.

나중에 이 원고가 책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녹음을 계속하니까 원고가 많이 쌓였는데 ‘이게 책이 될 수 있나?’ 생각했을 때 확신은 없었어요. 방송 원고는 입말이라서 귀로 들을 때 중언부언이 필요하잖아요. 반면 글은 중언부언을 하면 안 되니까 고치고 또 고쳤는데 충분히 글로 옮겨졌는지 모르겠어요.

선배 시인인 서효인 안온북스 대표님이 출간을 제안하고 직접 편집하셨죠. 『희지의 세계』에 이어 두 번째 호흡이었어요.

시집을 낼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시인이라 편한 점이 많았어요. 시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기에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 일의 진행이 참 빨랐습니다. 원래부터 편한 사이였으니 더욱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저자를 잘 이해하고 배려해주셔서 시집을 낼 때도, 이번 책을 함께 만들면서도 참 감사했어요.

2016년에 <월간 채널예스>에서 ‘황인찬의 시로 말하다’ 시집 리뷰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소개했던 작품은 김혜순 시인의 12번째 시집 『죽음의 자서전』이었고요. 1년간 황인찬 시인이 고른 시집들을 보면서 폭이 굉장히 넓다고 생각했어요. 낯설고 실험적인 작품부터 익숙한 시집까지, 무척 신중하게 작품을 고르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래도 인터넷서점에서 만드는 잡지는 책 판매랑 직결되잖아요. 웹진에 칼럼이 올라가면 책 링크로 바로 연결이 되니까 독자들이 특별히 많이 봐주셨으면 하는 시집을 고르려고 했어요.

반면 오디오 콘텐츠에 소개할 작품을 고르는 건 또 달랐을 것 같아요. 청취자들을 염두에 둬야 하고 음성으로 듣는 시니까요.

맞아요. 어떤 시를 소개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었는데요. 일단 좋은 시를 소개하는 게 가장 중요했고 귀로 들었을 때 잘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선택하려고 노력했어요. 아무래도 시 자체가 낯선 청취자들이 많으니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시들을 주로 골랐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시를 영업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시 영업사원’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와, 이거 써도 돼요? 나는 시 영업사원이다!

물론이죠.

그럼 영업을 너무 잘해서 인센티브를 두둑하게 받았다고 가정해볼게요. 시 영업을 위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세요?

아주 멋진 일을 기획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제가 그런 기획에는 영 약해서 대단한 일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다만 그 인센티브가 매우 충분하다면 역시 번역 지원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국내 독자에게 전하는 일도 아주 중요하지만, 동시에 해외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일 테니까요.



가장 내밀하고 정확한 표현 방식

시, 소설만 발표했던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 친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이런 질문을 해도 괜찮나?’ 고민만 하다가, ‘왠지 말해줄 것 같아!’ 싶은 편안함. 이번 산문집에는 어린 시절 이야기도 꽤 많이 하셨어요.

실은 ‘내 이야기를 너무 덜 말했나?’ 하는 생각이 오히려 있었어요. 그냥 옛날의 내가 이런 사람이어서 지금의 내가 된 거라 과거 이야기 자체가 그렇게 부끄럽진 않았어요. 항상 시를 통해 더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으니까 크게 부담이 없었어요. 아마 이유를 따져보면 시를 거쳐서 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작년에 지역 서점에서 북 토크를 한 영상을 봤어요. 시인이라면 시를 당연히 좋아하지만 황인찬 시인은 시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더라고요. 생활인으로 살아갈 때도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굉장히 짙은 사람으로 읽힙니다.

시인들은 사실 거의 다 시 오타쿠예요. 시라는 양식을 굉장히 사랑하고요. 그래서 낯선 시인들끼리 만나도 되게 편하게 말해요. 이미 서로의 시를 읽었고, 서로의 시를 잘 알고 있기에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에게는 한 편의 시를 쓰는 일,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고,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게 더 중요해요. 그래서 한 편의 시보다 시와 더불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게 더 중요해요.

시라는 형식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적은 말로 아주 정확하고 정교하게 말할 수 있다는 점 아닐까요? 언어로 하는 소통 행위 가운데 가장 내밀하고 정확한 표현 방식이 시니까요. 바로 그 점에서 쓸 때도 읽을 때도 다른 양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시만의 기쁨이 있는 것 같아요.

‘시인 복지’가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 조금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요. 시인으로 살아가기에 이해 받는 부분들이 있어요. 금전 문제에 약해도 ‘시인이니까’라고 이해받을 수 있고, 또 어떤 부분에 예민한 모습을 보여도 양해를 얻기가 쉬운 것이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이기도 하잖아요. 시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시에 충실하게, 그리고 시인답게 살아가고자 하는데 그런 점들을 조금은 배려받는다는 뜻일 거예요. 다만 그런 시인 정체성에 너무 휘둘리거나 그 정체성을 빌미로 다른 사람을 휘둘러서는 안 되겠죠. 

“가벼운 자기혐오가 글쓰기의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61쪽)라고 쓰셨어요. 여기서 ‘가벼운’이 너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심각해지면 자기를 먼저 돌봐야 하니까요. 진짜 중요한 건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안 하는 일. 그게 저에겐 무척 중요해요. 시간과 투자를 잘 따져서 효율을 뽑아내는 것도 프로지만, 동시에 보다 더 나은 걸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프로의 덕목이니까요. 더 나아질 여지가 생기려면 마냥 낙관적인 것보다 심각한 비관이 더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종삼의 시 「이 짧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죄와 벌’이라는 글을 쓰셨어요. 어릴 때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죄책감을 자주 느끼는 성격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어쩌면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유년을 보낸 아이들의 공통적 특성이 아닐까도 싶어요.

아마 그런 면이 있을 거예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목회를 하셨다는 사실이 제 세계관을 만들 때 큰 영향을 미쳤을 거고요. 요즘 느끼는 건 개인의 삶에서는 내가 약속을 잘 지키면서 살면 되니까 크게 죄책감이나 강박을 갖지 않는데, 어른이 되고서 관점이 좀 달라졌어요. 내가 잘 사는 일이 혼자만 잘 사는 일로 끝나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죄책감을 비롯한 죄의식 같은 것이 분명히 작동해요. 스스로의 잘못에 기울던 마음이 이제 다른 사람들과 잘 나눠가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방향성이 조금 바뀌지 않았나 싶어요.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펴낼 때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셨어요. 이번 산문집을 묶으면서는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나요?

사람들과 함께 읽는 일, 함께 생각하는 일의 중요성을 많이 떠올린 것 같아요. 오디오 클립 녹음할 때도 항상 클로징에 “함께 읽고 함께 생각해요.”라고 말했거든요. 이 책으로 어떤 시인이 궁금해져서 그 시인의 시를 찾아보게 된다면 가장 큰 보람일 것 같아요. 더불어 시에서 출발한 제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각자의 삶을 생각해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죠.

 


이미 그 시를 충분히 읽고 이해한 것

요즘 아동문학에 관심이 많다고요. 그림책 추천도 자주 하시던데요. 

원래 좋아했어요. 서점에 가면 매대를 꼭 둘러보고요. 전문적인 분들만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따라 읽고 있었는데요. 특별히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마 문단 내 성폭력 사건 이후일 거예요. 문학이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을 계속 품게 되면서 아동문학의 존재 방식이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요. 어떤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추천할 기회가 생기면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아동문학을 추천했어요.

시 그림책을 써봐도 좋겠어요.

안 그래도 6월 즈음에 그림책이 한 권 나와요. 대학원을 다닐 때 김서정 선생님의 아동문학 수업을 들었는데 동화 아니면 청소년 소설을 써야 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소설을 못 쓰겠더라고요. 너무 어렵다고 말씀드리니까 동시를 쓰거나 그림책을 상상하면서 글을 써보라고 하셨어요. 그때 쓴 글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봐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셔서 좋다고 했어요. 출판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 이명애 선생님께서 그림을 맡아주셔서 후반 작업 중이에요.

대학에서 강의를 하시죠. 시 창작 수업인가요?

지금은 두 곳에서 수업을 하는데요.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에서 시 강독과 창작 실기 수업을 해요.

수업 내용이 확실히 다르겠어요. 

그렇죠. 대학원 전문가과정은 주로 어르신들이 많이 오시는데 의욕이 엄청나요. 대체로 시에 대해 약간의 고정 관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선입견을 버리시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요. 20대 학생들과는 문학의 지형도를 함께 그리는 느낌으로 수업을 해요. 사실 문학의 지형도는 사회의 지형도랑 겹쳐지니까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하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강조해요.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다는 이야기는 시인님의 독자라면 많이들 알고 계시죠. 창작자를 꿈꾸기 전에 최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사실 꿈이라고 할 게 별로 없었어요. 책을 좋아하고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고등학생 때 일본어 시험을 봤거든요. 어쩌면 번역가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 특별한 일이 제게는 예술이었는데 미술, 음악 같은 분야에는 아무 소질이 없었거든요. 막연히 글 쓰는 일이 싫지 않았으니까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살려나 생각했어요. 책하고 아주 먼 삶을 생각하진 않았죠.

학교에서 본 시인 선생님이 너무 멋있어서 시인이 될 마음을 가진 만큼 전봉건, 이승훈, 김종삼 등 좋아하는 시인들의 이야기도 자주 하십니다. 시인이라면 시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황인찬 시인에게는 무척 각별한 시 사랑이 계속 느껴져요. 물론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을 읽어서 더 그러겠지만요.

저는 동료 시인에게도 쉽게 질투를 느껴요. 세상에는 저보다 나은 시인들이 정말 많고 제가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시인도 너무 많죠. 그 모든 시인에게 깊은 존경과 미움을 동시에 느껴요. 만약 시 쓰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 동경과 부러움은 더 격렬한 마음으로 변해버렸을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강연에서 “시는 알고 있는 걸 쓰는 게 아니다, 모르는 걸 확인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 말을 들으니까 시가 굉장히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시를 조금 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은, 너그럽게 시를 읽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세상 그 무엇을 보든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가 그림을 감상할 때, 꼭 그 그림에 얽힌 모든 정보와 맥락을 알고 있어야만 그림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림의 색채와 선을 보고 감동하듯, 시의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보고 무엇인가를 느낀다면 사실 이미 그 시를 충분히 읽고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요즘 가장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시를 쓸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테고, 조금 더 넓게 이야기하자면 차별금지법 제정이 제일 중요하겠네요. 함께 힘냅시다.




*황인찬

시인.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황인찬 저
안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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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은 인터뷰] 보다 보면 살고 싶어질 거야 -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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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는 독자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에세이가 출간됐다.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칼럼, 에세이, 스탠드업 코미디,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는 윤이나 작가는 이 책을 두고 “장르 불명 인터랙티브 옴니버스 에세이”라고 명명했다.



지난해 두 권의 에세이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를 출간하고 또 신작이 나왔다! 원래 이렇게 부지런한가?

황효진 작가와 쓴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는 2020년에 쓴 글이 1년이 지나 출간된 거였고, 단독 저서는 1년 만이라 연이어 출간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1월에 첫 소설 「아날로그 로맨스」가 실린 『무드 오브 퓨처』가 출간돼서 3~4개월 간격으로 책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다들 ‘또 나와? 도대체 어떻게? 헤르미온느야?’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가지고 있었던 원고는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연재 원고를 상당히 많이 고쳐서 새로 쓴 기분이긴 하다. 쓰는 동안 행복했기 때문에 세상에 나온 지금은 홀가분한 상태다.

프롤로그에 “일단 글쓰기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일을 통틀어 경제적으로 가장 저부가가치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데.(12쪽)”라고 썼다. 그럼에도 꾸준히 글을 쓰고 출판하는 이유는 뭘까?

늘 ‘마감 노동자’로서 내가 하는 일을 돈으로 환산하고 직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시급으로 환산했다가 정말 큰 충격을 받은 게 벌써 4~5년 전의 일이다. 정작 첫 책을 제외한 저서가 모두 그 이후 출간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긴 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읽는 사람이라서 쓴다. 나는 창작자로서 내가 보고 즐길 수 있는 무엇을 만들고 싶다. 내가 여전히 책을 읽고 그 안에서 모르는 세상을 만나고, 우연히 만난 문장에 내 삶을 겹쳐 두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책을 쓴다. 장르와는 상관없이 읽고, 보기 때문에 모든 장르를 쓰는 거고.

가장 추천하는 OTT 작품을 선별했다. 기준이 있었나?

일간지에 연재되었기 때문에 시의성을 생각했고, 될 수 있으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지는 않은 작품, 찾아 봐야 볼 수 있는 작품을 다루었다.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는 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해서 다큐멘터리에 관한 글도 많이 썼다. 보통 한 줄 요약이 어려운 이야기, 복잡하고 고유한 여성 인물이 등장 하는 이야기에 끌린다. 엄마가 책을 읽고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를 좋아하냐’고 하셨는데,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 같아 충격을 받았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작품이 있다면?

책을 읽은 지인들이 하나같이 <올리브 키터리지>에 관한 글의 같은 문장만 골라와서 조금 곤란할 지경인데, 이 질문을 받고 깨달았다. 그들이 모두 책을, 소설을, 종종 소설만이 해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를 본다면, 소설과 드라마가 각각 같고 또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좋은 이야기’를 우리와 만나게 하는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웨이브에서 볼 수 있고, 이 정도까지 얘기 했으면 정말 꼭 봤으면 좋겠다.

“픽션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나는 해피 엔딩을 기대하지 않는다.(13쪽)”고 썼지만 누군가 “당신이 정의하는 궁극의 해피 엔딩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드라마 데뷔작인 <알 수도 있는 사람>이 열린 결말로 끝났다. 잘 봐오던 시청자들이 악플을 달고, 작가를 찾고, 심지어 해외의 드라마 리뷰 사이트에도 결말을 납득할 수 없다는 후기가 올라올 정도였다. 더 많은 수의 대중에게 만족을 줘야하는 드라마 작가로서는 뼈에 새긴 조언이지만, 이야기를 끝내는 방식으로서는 여전히 해석의 여지가 많고 닫아 두지 않은 결말을 좋아한다. 해피(혹은 새드)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엔딩이, 나에게는 최고의 엔딩이다.

OTT 서비스를 구독하지 않는 독자라도 이 책을 재밌게 볼 수 있을까?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이 대부분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은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뭔가 보고 싶지만 보기가 싫다’고 생각하면서 OTT 메인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는 분들, 작품과 추천이 넘쳐나서 오히려 뭘 봐야할지 고를 수 없는 분들에게 필요한 책이다. 마지막까지 후보였던 제목 중에 ‘보다 보면 살고 싶어질 거야’가 있었는데, 보다 보면 살고 싶어지고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만나 주시면 좋겠다. 여기에는 작가 윤이나의 에세이도 포함이다.

다음 작품을 쓰고 있나?

책 대신 다음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단행본 세 권과 공저 두 권이 나오는 동안 계속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또 고치고 있는 상황이라 정확히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만나실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해서 아쉽다. 예정된 책이 없으므로 <월간 채널예스>를 통해 홍보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인데 그래도 만나볼 수 있는 채널은 OTT가 될 것 같다. 꽤 성실한 독자이자 좋은 이야기를 열심히 찾아 보는 시청자로서의 내가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의 별책 에세이를 쓰고 싶어지는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윤이나

칼럼부터 에세이까지, 스탠드업 코미디부터 드라마까지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고 있다. 2016년 첫 에세이집 『미쓰윤의 알바일지』를 출간했고 2017년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일하는 여자들』의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같은 해에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람>
을 썼다. 콘텐츠팀 헤이메이트를 통해 읽고, 보고, 말하는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여성들과 함께 나누며 ‘나의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있다. 동료와 함께 팟캐스트 <시스터후드>를 만들고 있다. 띵 시리즈에는 <라면>으로 참여했으며 '하얀 음식'을 싫어한다.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윤이나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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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수진 “국제 연애, 항상 쓰고 싶은 주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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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인 남편을 둔 서수진 소설가에게 ‘국제 연애’는 언젠가 꼭 쓰고 싶은 주제였다. 연애라는 관계 안에 사회, 정치적인 맥락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국제 연애만큼 잘 보여주는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뵙는 여자 친구 어머니께 빗자루를 선물하겠다는 호주 남자 ‘데이브’. 남자친구의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서 설거지하려는 한국 여자 ‘유진’. 두 사람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소설 『유진과 데이브』를 읽다 보면 ‘혹시 작가의 경험담이 아닐까’하고 궁금해지는데 이에 대해 서수진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호주인과 결혼했다. 이 책을 나와 남편의 연애 이야기로 읽을 독자들을 위해 몇 가지 항변을 적어둔다.’   _(201쪽)

 


인물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어요

「작가의 말」까지 다 읽었을 때, 가장 궁금한 건 이 소설의 시작이었어요. 어떻게 쓰게 됐나요?

오래전부터 국제 연애에 관해 쓰고 싶었어요. 연애 안에 사회, 정치적인 맥락이 담겨 있다는 걸 그 무엇보다 국제 연애가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런 제 고민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한국전쟁이나 세계대전, 한인 살인사건과 같은 사회, 정치적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넣었고요.

호주인 남편을 둔 작가님께서 국제 연애의 불가능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사랑의 완성이 결혼은 아니잖아요. 이 소설이 사랑의 실패라거나 불가능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사랑의 가능과 불가능, 더 나아가 사랑이 과연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나와 닮은 점이 많은 이야기를 쓰는 일이 어쩌면 그 반대보다 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유독 쓰기 어려웠던 장면 또는 힘들었던 점이 있었나요?

글을 쓸 때 인물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객관화하지 않으면 글이 써지지 않아서 3인칭을고집하고, 감정 서술도 배제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연애소설이다 보니 감정을 깊이 다루는 장면이 많아서 쓰기 쉽지 않았어요. 인물의 감정을 다루되 어떻게 객관적으로 쓸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썼죠. 

작가님 작품에는 외국인, 외국어 같은 소재가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외국인 남편을 만난 지 12년 되었고, 그동안 외국을 떠돌면서 외국인으로 살았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경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어요. 외국인으로서 경험하는 자기소외, 자기혐오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고요. 한동안 이러한 주제를 다뤄 보려고 해요. 기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웃음)


서글프지만, 그게 삶이 아닐까요?

책의 제목이기도 하죠. ‘유진’과 ‘데이브’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나요?

인물의 나이와 국적, 성별을 정하고 나면 같은 조건을 가진 실제 이름들을 많이 찾아보는 편이에요. 그중에 제가 생각하는 인물의 느낌과 닮은 이름을 고르고요. 이번에는 둥그런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유진이 데이브의 이름을 처음 듣고 둥글고 부드럽게 들려서 마음에 들었다는 문장이 있거든요. 그런 느낌의 이름을 상상하면서 골랐어요.

주인공 유진은 미술을 전공했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좌절을 경험하고 도망치듯 호주로 갔다고 하지만, 왜 그림을 그리지 않는지 정확히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유진이 A급 갤러리에서 전시를 따낼 거라고 모두 예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서술이 있어요. 졸업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데뷔하지 못했고요.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리기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아요. 저도 습작 시절을 오래 거쳤고, 작가로 데뷔하지 못하면서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지쳤던 때가 있었는데요. 그런 마음으로 유진의 과거를 썼어요.

유진은 이유를 정확히 모른 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기분으로 울기도 해요. 이때 유진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는데 왜 엉망이 된 건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지, 무엇이 그렇게 만든 건지,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를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달랐을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유진도 그랬을 것 같아요 다시 말해서 모든 게 나한테 있지 않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그저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엉망진창의 순간이요. 서글프지만 그게 삶이 아닐까요?

데이브의 여동생 로렌에게는 동성 파트너가 있어요.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로렌 커플의 관계가 매끄러워 보여서 상대적으로 유진과 데이브의 관계가 더 아슬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로렌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로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의 행복한 삶에 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고, 이 소설에 그 일부를 담았어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친구라 아마 다른 소설에서 다시 등장하게 될 것 같아요.

소설 속에 ‘뭉개진 그림’이 두 번 등장해요. 무언가의 은유처럼 느껴졌는데요.

무언가를 뭉개는 건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거잖아요. 뭉개는 행위가 사랑에 대한 유진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경계를 허물고 싶은 마음이요. 그런데 유진은 선이 무너지면서 모든 게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하게 되죠.



답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다름’에 대해 자주 생각했어요. 작가님에게 ‘다름’은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그어 놓은 선 바깥의 무엇인 것 같아요. 소설 속에 유진이 데이브의 가족과 자신의 사이에 그어진 선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유진은 데이브와 그의 가족들이 그 선을 그어놓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선을 만든 건 유진이라고 생각해요.

‘선’을 대하는 유진과 데이브의 태도가 다른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선 바깥에 있는 사람을 인정하고 상대의 선을 존중해주는 것이 사랑인가, 혹은 선을 무너뜨리는 것이 사랑인가 알 수 없지만, 이 지점에서 유진과 데이브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지죠. 나는 선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사람인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이 책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퇴고 과정에서 삭제된 내용이 있다면요?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자기혐오가 있다고 했잖아요. 유진이 외국인으로서 호주에 살면서 느끼는 자기혐오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비빔밥을 보면서 개밥 같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너무 과하다는 편집팀의 의견을 듣고 삭제했는데요.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웃음)

외국인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작가의 말」이 재미있었어요. 책을 읽은 남편분의 소감이 궁금해지더라고요. 

한국어 실력이 소설을 읽을 정도는 아니어서 책을 다 읽지는 못했는데요. 「작가의 말」을 읽고는 데이브가 자신보다 더 멋있냐고 묻더라고요. 아주 잘생겼다고 답해주었습니다. (웃음)

이런 질문도 드려보고 싶네요. 나와 다른 누군가와 연애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걸 몰라서 이런 소설을 쓴 것 같아요. (웃음) 답을 알았다면 연애가 어려울 일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이렇게 소설까지 쓸 일은 더 없었겠죠. 그 답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누군가에게 한 장면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싶은가요? 

1장에서 유진이 섹스에 관한 문화 차이를 발견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부분이 아주 흥미롭게 읽힐 것 같아요. (웃음)



*서수진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020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는 『코리안 티처』, 『골드러시 Gold Rush』 등이 있다. 현재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다.




유진과 데이브
유진과 데이브
서수진 저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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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서울대병원 교수 "약의 정체를 알고 약을 신뢰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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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여름 <유 퀴즈 온 더 블럭> 제68화 ‘살면서 안 만나면 좋을 사람’ 편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이승훈 서울대학병원 신경과 교수가 대중의학서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를 펴냈다. 456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술술 익힌다. 무서운 질병에 걸린 환자도 건강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책을 꺼내든 독자들도 “이런 책은 처음 본다”는 반응이다. 최신 연구 자료를 기반으로 한 매우 솔직하고 과감한 건강 지식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뇌졸중의학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는 이승훈 교수는 최근 뇌졸중 교과서 시리즈 6권을 완간했고 2016년 나노자임을 연구해 온 서울대학병원 연구팀과 바이오 회사 ‘세닉스바이오테크’를 설립해 올해 2월 나노자임 신약 CX213 기반 물질인 ‘지주막하출혈 나노자임 치료제 CX111’과 ‘패혈증 나노자임 치료제 CX171’의 미국 특허 등록을 마쳤다. 



병이 곧 우리의 적은 아니다

뇌졸중 전문의인데 암, 감기/코로나19 등을 총망라한 대중의학서를 썼다.

출판사에서 처음 책을 제안했을 때는 뇌졸중 건강서를 원했다. 그래서 서점에 나가서 관련 책들을 쭉 보니까 일본에서 나온 책이거나 한의학, 민간요법 등이더라. 책을 쓴다면 과학교양서로 만들고 싶었는데 일반 대중들에게 외면 받는 책을 쓰고 싶진 않았다. 환자를 비롯한 일반인들에게 꼭 필요한 건강 도서를 쓰고 싶었다.

제목부터 과감하다.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데 책을 읽고 나니 해답이 조금 보이더라.

사람의 몸은 부족하고 불완전해서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질병과 살아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좀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큰 질병을 평생 피할 것이라는 막연하고 잘못된 믿음, 불필요한 공포감, 잘못된 영양제 사용과 필수적 약물 멀리하기 등 비과학적인 건강 태도들을 최대한 의학적, 과학적 시각에서 책에 담아 내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질병 분류법도 제시했다.

2016년에 바이오 벤처 회사를 설립하면서 만든 약물이 급성 뇌손상 뿐만이 아니라 심장, 폐, 간 등의 장기에도 영향을 끼치는 약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장기를 다시 공부하게 됐고 암은 오래 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분야다. 뇌졸중이나 심장질환은 병이 생기는 원인이 명확하다. 뇌졸중은 2차성 질환이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흡연, 음주 등의 위험 요인이 수년에서 수십 년 지속된 후 발생하는 동맥경화성 혈관병변이 일으키는 질환이다. 그런데 암은 느닷없이 예고없이 일어나는 질병이다. 암은 정상 세포의 증식 및 분열 과정에서 발생한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생긴 세포들이 무한 증식하면서 벌어지는 병리학적 과정인데, 반드시 노화가 아니라도 암세포는 발생할 수 있다. 당연히 발암물질에 자주 접촉된 세포는 더 많은 증식과 분열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암세포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

암 환자의 경우, 표적치료제 같은 항암은 표준화가 돼 있지만 치료 후 수술이 가능하다고 하는 의사가 있고 또 반대의 경우가 있다. 환자들의 선택이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뇌졸중 환자 중에 몇 년째 주치의로 보고 있는 암환자가 있는데 치료에 매우 적극적인 분이다. 암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방사선 치료로 암을 거의 억눌러 놓았는데 그 옆에 작은 암이 또 생겼다. 당연히 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직검사를 해보니 새로 생긴 암이었다. 그럼 이 암을 따로 봐야 하는데 방사선, 항암을 하는 의사들이 모두 수술을 반대했다. 환자가 포기를 했다면 그 뜻을 존중해줘야 하지만 치료 의지가 무척 강했다. 고민을 하는 시간 동안 그 암이 말도 안 되게 커져서 결국 방사선 치료를 했고 정말 다행히도 결과가 좋았다. 환자가 불가능하지 않은 수술을 하겠다고 하면, 의사는 이 수술에 따른 부작용을 잘 설명해주면 된다. 치료하는 과정에서 죽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환자의 의지를 의사가 꺾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택은 환자가 하는 일인데 치료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명의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기준으로 명의를 판단할 수 있나?

명의의 기준은 사실 어렵지 않다. 비슷한 중증도의 환자들을 맡았을 때 환자를 많이 호전시키는 의사가 명의다. 하지만 지금까지 차트를 기반으로 통계를 내서 의사들의 진료 수준 분석 연구가 시행된 적이 없다. 보험심사평가원에서 해마다 각종 질환의 의료 적정성 평가를 시행하지만 의사들에 대한 평가가 아닌 병원의 수준별 평가다. 외래 진료 시간이 굉장히 짧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명의는 존재하기 힘들다. 병원, 학회, 방송, 언론의 평가보다 담당 의사와 많은 교감을 하면서 그 의사의 진정성과 실력을 스스로 잘 판단해보는 게 최선이다. 무책임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명의라는 허울 없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상급종합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볼 때 진료 시간이 워낙 짧으니 의사에게 질문을 하기도 어렵다.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의사들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환자의 질문에 핀잔을 주는 의사들도 있다. 의사들과 어떻게 소통하는 것이 좋을까?

중요한 걸 잘 물어보는 게 좋다. 어떻게 보면 너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걸 반복적으로 묻는 분들이 있다. 의사가 이미 정확히 답한 부분에 있어서는 받아들이고 다른 질문을 해야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집요하게 계속 물으면 의사와 라포를 형성하기가 어렵다. 의사와 대화할 때는 치료를 받은 이후의 예후에 관한 답을 확실하게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질문을 피하는 의사들은 명의일 수가 없다.

암 환자임에도 완치되고 일상생활을 문제없이 잘하는 사람들도 많다. 병을 극복하는데 환자의 태도가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칠까?

무척 중요하다. 병이 없어도 생활이 몹시 괴로운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뇌졸중 같은 병을 가졌음에도 행복한 노후를 지내는 사람도 많다. 책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질병의 유무가 아니다. 심각한 질병은 예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이 질병에 걸렸다면 충분히 치료하고 건강하게 살 기회가 있다. 인간은 병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병이 곧 우리의 적은 아니다. 병을 갖고도 행복하게 사는 삶은 병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얼마나 슬기로운지에 달려 있다.



증명된 데이터를 믿고 약을 현명하게 먹어야 한다

2020년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때 “건강을 챙기기 위한 교수님만의 방법”을 묻는 질문에 “약을 먹습니다”라고 답해 큰 화제를 모았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심방세동을 가진 분들은 항혈전제와 함께 각각을 조절하는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물론 위험 요인 발생 초기에는 약물 없이 생활습관 개선을 시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 약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약을 잘 챙겨 먹는 것이 훨씬 이롭다. 물론 투약 여부는 처음에 신중하게 결정하되 결정된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잘 먹어야 한다. 약을 꾸준히 잘 먹는 사람은 위험 요인이 더 발전되지 않고, 해당 약물 하나로 평생 조절되는 사람도 많다. 반대로 약을 적절히 먹지 않으면 고혈압, 당뇨 등이 더욱 나빠져 나중에는 약물 하나로 막을 것을 3~4가지를 써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악화되기도 한다.

책에서 무척 유용했던 정보가 ‘감기 예방법’이다. 적어도 며칠간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한 방법을 소개했다.

일단 감기의 정의를 알아야 한다. 감기 바이러스는 에어로졸, 비말, 오염된 물건 및 손을 통해 전염되고 사계절 항상 주변에 존재한다. 또 감기 바이러스는 체온보다 약간 낮은 온도인 32℃에서 증식이 활발하다. 감기를 예방하려면 마스크를 쓰는 게 좋다. 마스크가 막는 건 감기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감기 바이러스가 담긴 비말과 에어로졸 및 바이러스로 오염된 본인의 손을 막아준다. 수시로 손소독제로 소독하는 것도 중요하다. 바이러스 중 외피를 가진 바이러스들이 알코올에 노출되면 외피에 손상을 입는데,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바이러스는 대개 외피를 갖고 있어 알코올 소독제만으로도 충분한 살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 얼굴, 특히 콧속을 자주 닦는 게 좋다. 바이러스가 아무리 얼굴에 많다고 해도 결국에는 코나 입을 통해 호흡기로 들어가야 점막 안에 정착해 감기를 일으킬 수 있어 구강과 비강의 청결이 무척 중요하다. 더불어 귀가 후 옷은 바로 세탁하고 전신 샤워하고, 자기 직전 양치하는 것, 취침 시 저체온을 방지하는 것도 감기를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다. 모든 감염은 위생이 제일 중요하다.

“담배는 최악의 위험물질”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의학적으로 할 말이 없을 정도, 논할 가치도 없다. 폐암을 비롯한 거의 모든 암의 발암물질이고 뇌졸중 입장에서도 뇌경색과 뇌출혈을 모두 확실하게 증가시키는 위험 요인이다. 수많은 예방의학 연구를 통해 백해무익하다는 것이 확실히 밝혀진 이후에도 일반인에게 이렇게 쉽게 노출시킨다는 게 이해할 수 없다. 담배를 끊는 것을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 잘 알지만 국민 건강을 위해서는 담배 추방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60세 이후 심장질환이나 뇌졸중이 생겼다면 갑작스러운 체중 감량이나 다이어트는 오히려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423쪽)”고 말했다.

일단 60대 이상에 비만한 수준이 아니라면 함부로 살을 빼려 하지 말고 의사와 상담하는 게 좋다. 50대 이하라면 일정 수준의 다이어트는 괜찮지만 과격한 식이 억제는 절대 금물이다. 우리 연구팀의 분석에 의하면 급성 뇌경색 환자는 체중이 가벼울수록 초기에 뇌졸중이 심각하게 발현될 가능성이 높았고, 3개월째 다시 확인했을 때에도 마른 환자의 예후가 더 불량했다. 또한 우리나라 성인 여성의 경우에는 비만보다 저체중이 더 문제다.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단백질을 많이 함유한 육류 및 생선, 적당한 수준의 탄수화물과 지방식,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은 야채를 골고루 먹는 균형 잡힌 식단이다.



평소에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상투적이지만 건강 생활을 해야 한다. 적당한 운동, 적절한 체중 관리, 금연, 절주. 이 네 가지만 잘 지켜도 장기와 면역 시스템이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30세가 넘었다면 혈압을 가급적 자주 재보는 게 좋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좋다. 40세가 넘었다면 1년에 한 번 당화혈색소와 저밀도 콜레스테롤을 측정하고, 2년에 한 번 위내시경, 5년에 한 번 대장내시경을 추천한다. 초음파 검사는 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니 권고하는 만큼 해도 괜찮고 뇌 MRI는 50세가 넘었다면 한 번쯤은 해보기를 권한다.

자녀들이 어릴 때, 어떻게 건강을 지도했나?

쓸데없는 영양제는 먹이지 않았다. 오히려 뭘 먹으려고 하면 먹지 말라고 했고 샤워와 양치질을 꼼꼼히 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예방접종.

책의 타이틀이 ‘아주 작은 수고로 생애 최정점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책을 선택한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약의 정체를 알고 약을 잘 드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약을 특수하게 생각하는데 약은 필요한 효과를 내기 위해서 만든 저분자 물질이다. 당연히 잘못된 약을 먹으면 안 되고, 그 약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은 의사와 당연히 상의하고 내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약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약 때문에 얻게 되는 혜택은 엄청나다. 많은 환자들이 약 때문에 내 몸이 좋아지는 것보다 본인이 느끼는 몸의 이상 증상으로 몸이 나빠진다고 생각하는데, 증명된 데이터를 믿고 약을 현명하게 먹어야 한다.

대중의학서를 또 쓸 계획이 있나?

질병 자체를 다루는 책, 뇌졸중을 아주 자세히 다룬 책도 쓰고 싶고 훗날에는 인간의 의식과 죽음에 관한 인문서도 써보고 싶다. 



*이승훈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 ㈜세닉스바이오테크 대표이사, (사)한국뇌졸중의학연구원 원장 및 뇌혈관대사이상질환학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다. 의학자로서 뇌졸중의 기초와 임상에 관한 200여 편의 국외 논문을 발표했으며, 대한신경과학회 향설학술상, 서울대학교 심호섭의학상, 유한의학상 대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관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및 보건복지부 장관표창 등을 수상했다. 이런 공로로 2014년 심장 및 뇌졸중 분야 세계 최고학회인 미국심장학회/미국뇌졸중학회(American Heart Association/American Stroke Association)에서 석학회원(Fellow of AHA)으로 추대되었다.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승훈 저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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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룡 "어른에게도 인성 교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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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룡 저자

국내 유일 독자적 인성 이론 및 실천 전문가 한무룡이 『성공하는 습관, 황금알을 낳는 비결이 인성이다』를 펴냈다. 전작 『3살 이전에 성공시켜라』, 『인성 훈련 365+성공으로 가는 길 세트』에 이은 신작으로 인성의 정의를 되짚어 보고 어릴 때부터의 인성이 왜 중요한지를 에세이로 풀어냈다.

한무룡 저자는 ‘인성’이라는 주제를 두고 20년간 연구하며“인성 교육은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말한다. 비용과 노력 대비 성과가 매우 큰 교육이기 때문이다.“좋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인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한무룡 저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경청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인성에 관한 세 번째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성공하는 습관, 황금알을 낳는 비결이 인성이다』의 집필 동기가 궁금합니다.

생각이 말과 행동이 되고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품성은 습관의 집합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습관이 모여 인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이론적으로는 너무 쉬워 인성교육과 형성에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 박사는 습관을 ‘실행 능력’이라 부르면서 이론적으로는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대신 습관이 되려면 구구단을 외우듯이 지독한 반복 학습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개인적인 인성 학습의 결과는 반복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쉽고 단순해도 대부분의 반복 학습은 재미없고 지루하여 작심삼일에 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인성이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임을 알면서도 인성 갖추기에 성공하는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어찌 보면 인성 형성이 수도승의 수련과 비슷한 면이 많아 그렇습니다. 다만 경중(輕重)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타고난 대로 살게 됩니다.(유대인은 종교적으로나 역사, 전통, 관습적으로 인성교육 교과서 격인 『탈무드』의 평생 반복 학습이 완전 생활화되어 이 어려움을 자연스럽고도 쉽게 극복합니다)

그렇다면 어려운 훈련을 쉽게 할 수 있는 우리식의 방법만 있다면 만사가 해결되어 유대인처럼 전 민족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연구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반복 훈련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과 도구를 개발하고 이 훈련법을 위주로 쓴 책이 지난번에 나온 『인성 훈련 365+성공으로 가는 길 세트』입니다. 솔직히 이때 제가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성의 이론은 적고 쉬운데 훈련만 되면 만사가 해결되니 실제로 더 할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독자로부터 “책이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네, 맞습니다. 인성은 쉽다는 점을 유달리 강조해 왔던 저로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인성이 낯설어서 어려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암기와 입시 위주의 교육만 받다 보니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행하거나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인성교육은 토론식 학습이나 예체능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모든 학교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 대세에 밀려 시행하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하는 훈련법을 익히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인성과 인성교육을 처음 대하게 되고, 처음 대하는 것이라 괜히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컴퓨터나 자동차도 몇 가지 안 되는 조작법이지만 이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처음 대할 때 거부감이 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컴퓨터든 자동차든 왼손 오른손은 물론 발까지 자유자재로 쓰면서 별로 어렵지 않게 조작합니다. 전혀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루라도 없으면 불편해서 생활을 못 할 지경입니다. 인성도 처음엔 낯설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생활 속에 녹아 들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컴퓨터나 자동차는 필수품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아무리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누구나 결국은 극복하고 익히게 됩니다.

반면 인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책에서는 쉬운 훈련법만 있다면 누구나 다가와서 익힐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즉, 말을 물가에 데려다 놓으면 자동으로 물을 마실 줄 알았는데, 말을 물가에 데려다 놓지도 못한 상태에서 말이 물을 마시기를 기대한 꼴이 되었습니다. 인성이라는 물가가 낯설어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성이 성공의 지름길이고 반복 훈련이 아무리 쉽다고 해도 우선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물가까지의 거리가 가깝다고 강조해도 한없이 멀리 느껴졌을 것입니다.

신작을 펴내면서 고민을 많이 하셨겠네요.

독자들은 많이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요.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번 책은 인성에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데 최대 목적을 두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물가까지 오게 되면 대부분이 성공에 목말라 있으니 물은 당연히 마실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사말도 ‘노래처럼 친근하게’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인성을 ‘상인 정신이 몸에 밴 상태’나 ‘장사 잘하는 성품’으로 풀이하였습니다. 인성은 ‘돈 버는 얘기’라고도 썼습니다. 이 외의 추가 사항은 물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의 반복입니다. 즉 인성이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하며 실제로 나타난 성과에 관해 더 깊이 있게 책에 담았습니다.



젊은 시절 “영업에 필요한 습관을 전 국민이 갖추면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 습관들의 핵심만 몇 개 말씀해 주신다면요?

가장 큰 핵심은 ‘경청’입니다. 물론 그냥 경청하는 습관이 아니라 몸에 밴 인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의 말이 좀 틀리거나 다르더라도 중간에 말을 끊거나 참견하지 않고 끝까지 듣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약간 미소를 지으며 들으면 좋을 것이고, 가끔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정말 슬기롭게 이겨 내신 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안 가질 수 없습니다”라는 식의 칭찬을 곁들이면 좋습니다. 이 두 가지 미소와 칭찬의 습관도 반복 훈련으로 인성이 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들어서 배운 것과 인성이 된 것의 차이는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입니다. 어설프면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지만 자연스러우면 감동합니다. 상대방이 감동해야 성과와 실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고 잘하는 사람도 훈련을 지속해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사회적인 갈등과 문제 대부분은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의견을 잘 듣는 남편에게 90%의 부인이 존경심을 갖는다는 설문조사가 있습니다. 자녀들도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는 부모가 최고라고 합니다. 경청으로 영업이 잘되어 수입이 늘어나니 좋고, 가정이나 사회를 행복하게 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미국 카네기재단에서 성공한 1만 명을 대상으로 5년간 성공의 요인을 질문한 자료를 보면 85%가 대인관계라고 답했습니다. 저자님은 원만한 대인관계를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인성이라고 하셨는데요.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가장 힘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것 역시 경청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여기에 더하여 상대방의 처지와 바꾸어서 생각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가 슬프면 같이 슬퍼하고 기쁘면 같이 기뻐하는 식입니다. 특히 조금이라도 재미난 얘기를 하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웃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화난 듯이 굳은 표정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방 얘기를 듣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얘기를 해도 표정은 요지부동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들어주다 보면 상대방이 자기의 고민을 혼자서 한 시간을 얘기하는 적도 있습니다. 모든 고민은 들어줄 상대가 있으면 반은 해결되고, 반은 자신이 해결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보다 대인관계를 좋게 만드는 방법은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외롭습니다. 고민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더욱이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거리를 하나 이상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상대방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자세가 마술을 부린다고 하였습니다. 즉 전혀 예상치 못한 계약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생전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도 해결됩니다. 고 삼성 이병철 회장이 자손에게 남긴 휘호도 ‘경청’으로, 경청의 광범위한 효과나 성과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리더십의 기본도 경청입니다.

책에 “현재 프랭클린 훈련법대로 13가지 과제를 바꿔가며 일주일 단위로 훈련을 하고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이 훈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과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인성의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반복입니다. 경청의 과제를 다시 예로 들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경청’ 과제를 마음에 담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구나 만나면 얘기를 정성스럽게 잘 들어줘야겠다’ ‘어제 보니 누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오늘 인사를 먼저 건넨 다음 얘기를 들어야겠다’라는 등의 몇 가지 전략도 세웁니다. 계획대로라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마음속 훈련이므로 하루에 3~5시간까지 과제를 시행도 하고 훈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명상하는 것은 아니어서 계획대로 되기가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중간에 다른 일로 인해 자꾸 연결을 놓치거나 잊게 됩니다. 어떨 때는 아침에 잠깐 하는 훈련 외에 까맣게 잊고 지내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항상 부족함을 통감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내일 또 도전합니다. 인성은 매일 훈련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일반 사람이 느끼는 어려움은 두 가지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반복 훈련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훈련한다고 해서 당장 성과가 눈에 보이질 않아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훈련한 것과 안 한 것과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훈련을 지속하다보면 언젠가 주위에서 먼저 반응이 달라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는 때가 오는 데 이때까지 참고 기다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이 같이 모여 학습하고 훈련하기입니다. 학교든 학원이든 교육자의 의지만 있다면 30초 동안 매 수업 전후 시행할 수 있습니다. 대학의 동아리에서도 할 수 있고, 기업의 회의 직전 30초 동안 시행할 수도 있습니다. 잠깐이지만 시너지 효과가 있어 성과는 좋습니다. 성과를 조금이라도 경험하면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인성은 생각이다

‘인사’의 중요성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먼저 하고, 미소 지으며, 칭찬하기, 경청하기’ 등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요즘 아이들은 쑥스러워서 낯선 사람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고 부모 뒤로 숨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고 있는 대로 부모가 먼저 시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탈 때 사람을 만나면 100%는 아니지만 먼저 인사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아파트의 경비실을 지날 때는 거의 100% 경비원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것도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부드러운 인상이면 금방 인사가 나오는데 굳은 표정이면 순간적으로 나도 굳어지면서 인사를 놓치는 때도 많기는 합니다. 언젠가 제가 손주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주민을 보고 인사를 하자 손주도 따라 합니다. 그분이 먼저 내리면서 인사를 하니 저도 했지만, 손주도 다시 따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에 썼듯이 세배를 예로 들어 인사의 효과를 설명하는 방법도 실질적이면서 재미도 있고 효과도 있습니다. 그냥 인사를 공손하게 잘하라고 가르치면 예절 교육입니다. 상대방에게 인사를 잘하면 성과와 실리가 생긴다고 가르치면 인성교육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동전을 주울 수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부모님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고 교육받은 세대라 돈 얘기가 입에서 잘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이 대부분 나중에는 예절 교육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자녀의 인성교육을 위해 새롭게 다짐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 나서면 당장 필요한 것이 돈인데 우리는 자녀에게 돈 얘기를 인색하다고 할 정도로 너무 안 합니다.

일부러 인사하기를 강제로 훈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잘하면 용돈을 올려주는 식으로 용돈과 연관시키면 효율성이 높습니다. 자녀가 나중에 사회에 나가 홀로서기를 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라는 신념을 갖고 시행하면 중간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이겨 나갈 아이디어나 방법은 많이 생깁니다.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부끄러워 잘하지 못하는 자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구직자가 면접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자신의 좋은 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면접을 보는 것이 좋을까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신이 좋은 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표현이 안 되면 면접에서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 대기업에서 취업 시즌에 ‘열정 한 가지만 갖고 오라’라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낸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기업에서 필요한 열정적인 습관이자 인성을 지닌 젊은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정을 지닌 인재가 있다면 당장 특채하겠다는 소리도 됩니다.

제가 권하는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면접장에 들어서기 5분 전 정도부터 자신의 온몸이 시뻘건 불덩어리라고 상상합니다. 그런 상태를 유지하다가 면접장에 뛰어 들듯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자연히 말도 자신 있고, 힘 있고, 진정성 있게 하게 됩니다. 그러면 면접관에게 열정이 전염되어 취준생의 말을 더욱 경청하고 감동하게 됩니다. 면접관이 ‘오랜만에 인재 하나 들어왔군’하며 만족할 것입니다. 제가 영업을 다닐 때 낯선 사무실 문을 들어서기 전에 늘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책에 많은 칼럼과 참고 도서가 인용되었습니다. 직접 경험한 사례도 궁금한데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좋은 인성으로 성공을 이뤄낸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요?

전작을 읽고 소감을 써주신 분들이 계신데요. 그 분들의 글 중 한 소감을 책 뒷장에 소개했습니다. 그 분은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영세한 건설 업체에 취업했습니다. 그런데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그나마 업체가 부도가 나서 오갈 데 없이 한겨울을 자재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나중에 직접 건설회사를 차렸으나 역시 몇 번이나 부도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비 때마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재기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건설회사의 부도는 아무리 본인이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해도 큰 회사에서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같이 부도가 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그만 회사를 시작으로 건설 업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처럼 어려운 시절이었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우뚝 서신 그분을 뵈면 정말 존경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건은 인성이란 생각입니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실패해도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재기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영 실패로 끝납니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거나 없게 하는 것이 인성입니다. 이분을 만나면 표정에서부터 이웃집의 친절한 아저씨 같은 푸근함을 느낍니다. 전혀 중견기업의 사장 같지 않습니다. 항상 말과 행동 모두 겸손합니다. 현재 여러 단체의 장도 맡아 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도 많이 합니다. 인성이 실패를 보듬어 안아주고 성공을 불러옵니다.

저자님이 청소년기, 또는 청년기로 돌아간다면 좋은 인성을 위해, 이것만은 꼭 실천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머니께서 6.25 전쟁으로 혼자가 되셨는데, 교육 지침이 두 가지셨습니다. ‘건강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먹고 산다’와 ‘착하게 살면 어떻게 해서든지 먹고 산다’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어느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 욕심이 없으니 무리하지 않아 얻어진 지극히 평범한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돈이 없어 수시로 겪는 고통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풍족하게 돈을 못 번 것이 꼭 어머니 말씀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향은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들에게 어머니 말씀에 얽힌 얘기를 곁들이며 ‘건강하면 돈을 벌고,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와 ‘착하게 살면 돈을 벌고,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다’라고 돈이라는 단어를 꼭 넣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이 말이 복잡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유대인처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동전을 주울 수 없다’라고 가르치면 됩니다. 

이런 상인 정신을 지닌 청소년이 훌륭한 기업가도 되겠지만 정치가나 과학자도 됩니다. 미국에서는 유치원생을 상대로 증권 교육을 한다는 식으로 이제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정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동안 많은 현장에서 인성 강연을 하셨는데요. 많은 강연을 하셨을 텐데요. 인성 교육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들어온 질문은 무엇이며, 어떤 이야기를 반드시 강조하셨나요?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질문 받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질문을 유도해도 강의가 끝나면 일어나 나가기 바쁘지, 질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역시 암기와 입시 위주의 교육이 몸에 익숙한 탓으로 완전히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질문을 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자녀 인성교육은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아이들은 착하게 키웠기 때문에 인성교육이 필요치 않다고 말씀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면 제가 되묻습니다. “요즘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업에서 취업 시즌이면 ‘스펙보다 인성’이라며 인재를 찾습니다. 댁의 자녀는 착하니까 취업에 별문제가 없겠네요”라고 하면 순간적으로 멈칫합니다. 그러면서 인성에 관한 자신의 정의를 스스로 수정합니다.

또 하나의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질문은 ‘어른도 인성교육이 필요한가?’입니다. 이는 강의보다 성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성에 관해 얘기할 때 느끼는 것입니다. 인성교육은 아이들한테만 필요하므로 자기는 교육 대상은 아니라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잘한다고 해도 한가지가 부족하여 주위에 상처나 피해를 줄 수 있다. 이를 스스로 발견하고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도 교육과 훈련은 필요하다. 더욱이 자녀의 인성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모임에서 엄숙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분이 있습니다. 만일 기업이라면 생산성 저하를 불러오고, 개인적이라면 우선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전혀 모릅니다. 모른 상태로 평생을 지내는 분도 많습니다.

특별히 어떤 독자들이 『성공하는 습관, 황금알을 낳는 비결이 인성이다』를 읽으면 좋을까요?

유대인 인성교육의 특징과 성과는 전 국민의 참여에 있습니다. 인성의 목적은 무슨 분야든지 ‘협력’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입니다. 협력하여 성과를 내기 위해서입니다. 협력하면 덧셈이 아니라 제곱의 성과를 냅니다. 이를 시너지 효과라고 하며, 시너지 효과는 기적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인성교육 중시 정책으로 유대인이 이뤄낸 국제적인 성과는 가히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인구는 작지만, 제곱의 효과이자 시너지 효과로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 국민이 읽고 반복 학습으로 인성이 형성된 상태에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국제금융그룹인 골드만 삭스에서 2050년에 남북통일이 되면 한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 2강이 된다고 전망한 적이 있습니다. 남북통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인성으로 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이루면 목표가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굳이 꼭 집어 추천하라면 자칫 심적으로 나약해질 수 있는 실업고등학교 학생, 군인, 보육원생에게 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다는 N포 세대를 가장 쉽게 구제할 수 있기에 추천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 말씀처럼 조그만 변화가 충분히 커다란 성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기업인에게 추천합니다. 그분들에게 인성과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알게 하여 위에서 말한 분들의 인성교육을 물질적으로 후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수입의 10%를 인성교육 기관에 기부한다고 합니다.

인성이라는 주제에 20년간 매달려 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스위스 취리히 공대에서 각국 국민 IQ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가 평균 106점으로 1위입니다. 최근까지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연속 제패로 손재주도 세계 1위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전 민족이 성공한다는 유대인에게 우리가 떨어질 이유는 인성교육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천 년 이상 내려온 그들의 인성교육 비결을 하루아침에 깨치거나 모방하기는 불가능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어 우리식의 인성 교육법을 연구하고 개발하다 보니 20여 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힘이 닿는 데까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구하고 훈련할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독자나 나아가 국민에게 바랍니다. 인성교육이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 운동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성교육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보다 성과와 실리를 크게 내면서 투자되는 비용이나 노력, 시간이 적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처럼 전 국민을 성공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직접 참여 하시지만 주위에도 적극적으로 전파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무룡

국내 유일 독자적 인성 이론 및 실천 전문가. 1947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에서 연극과 영화를 전공했다. 사회에 나와 광고와 영업 분야 일을 했고 광고 회사를 운영했다. 이때 ‘영업에 필요한 습관을 전 국민이 갖추면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기업체, 학교,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 습관에 관한 강의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성과가 극히 미진함에 지속적인 의문이 들었다. 이후 여러 문헌과 성현들 말씀을 종합하여 ‘습관이 반복 훈련을 통해 인성이 되어야만 비로소 성과가 나타난다.’는 답을 찾았다.




성공하는 습관, 황금알을 낳는 비결이 인성이다
성공하는 습관, 황금알을 낳는 비결이 인성이다
한무룡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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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롤리데이' 박신후 대표 "우리 제품은 행복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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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 ‘해피어마트’ 그리고 ‘해피어’. 브랜드 ‘오롤리데이’는 ‘누구나 해피어(행복한 사람)가 될 수 있다’를 모토로 제품을 만들고, 가치를 전한다. 시선을 사로잡는 캐릭터, 컨셉이 명확한 제품 라인, 팬을 향한 진심 어린 애정까지 오롤리데이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브랜드. 그래서인지 책 제안이 많았다. 박신후 대표는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다 문득 “밑바닥부터” 외롭게 브랜드를 키워온 시간을 지난, 꼭 그 자신과 같이 외롭게 브랜드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오롤리데이가 지나온 촘촘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기획에만 몇 달이 걸렸다. 할 얘기가 많았으므로 정확한 흐름을 만들고 싶었다. 카약부터 크루즈까지, 브랜드 ‘오롤리데이’의 성장기는 배에 비유할 만했고 그제야 지난 9년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행복을 파는 브랜드 오롤리데이』에 담을 수 있었다. 

뜻밖에 책을 완성하고 나니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앞만 보면서 달려왔던 시간이었다. 차근차근 내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싶더라. 회사가 커가는 이 시점에 책이 아주 큰 자극이 됐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에서 오는 영감들이 있었다”고 ‘롤리’(박신후 대표)는 말했다. 

“책을 다 쓰고 가장 크게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제가 하겠다고 얘기했던 것들을 다 해냈다는 사실이었어요. 그게 되게 큰 자극이었어요. 돌이켜봤을 때는 ‘한 일’이지만 과거에는 ‘할 일’이었잖아요. 그 ‘할 일’이 ‘한 일’이 됐다는 게 소름이 끼치게 놀랍더라고요. ‘말한 걸 다 했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되겠다’ 생각하게 됐어요. 오히려 책을 쓰고 나니까 앞으로 더 목표를 크게 잡고, 그걸 말하고, 나한테 믿음을 계속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덕분에 뭐든 못 할 게 없겠다는 자신도 생겼어요. 책이 큰 동기부여가 됐어요.”

 


진짜 밑바닥 굴렀던 이야기부터

책의 표지 디자인을 대표님께서 직접 하셨더라고요. 책을 준비하면서 만듦새까지 고민을 하셨던 거죠? 

책이 ‘오롤리데이’의 제품과 잘 어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책의 세로 길이도 저희 베스트셀러인 다이어리와 동일하게 맞췄는데요. 오롤리데이의 다이어리를 꾸준히 구매해서 모아온 분들이 계실 텐데, 그런 분들께 책도 하나의 세트처럼 보일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자주 사용하는 컬러와 서체를 사용해 오롤리데이에서 판매하는 제품과 같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도록 디자인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죠.

무엇보다 ‘촘촘함’에 놀랐어요. 책 뒷부분에는 Q&A까지 있죠. 정말로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는데요. 자신감처럼 보이는 동시에 일종의 연대감으로도 보이더라고요. 비슷하게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는 마음 말이에요. 

정확히 그런 마음이었어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누군가 찾아가서 얘기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일단 저는 어렸을 때 시작했잖아요. 주변에 사업체를 끌고 가는 사람이 없었어요. 또래 중에는 아예 없었고, 나이가 더 있더라도 제가 바라는 이상향의 브랜드나 회사를 꾸리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만 읽어도 위로 받고, 팁까지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공감을 많이 일으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이유예요. 문장도 구어체처럼 썼잖아요. 잘 읽히는 책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제가 직접 얘기해 줄 수는 없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는 언니가 옆에서 얘기해 주는 것처럼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어서 문장을 계속 입으로 읽으면서 고쳤어요. 그런 마음에서 팁도 많이 담았고요.

책 가장 앞부분에서 팀원 소개를 했죠. 눈에 띄는 건 첫 번째로 ‘해피어’를 소개한 점이에요. 팬에 대한 진심이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이 존재를 첫 번째로 꼽는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해피어가 없었다면 오롤리데이는 당연히 없었을 거예요. 어떤 가게든 손님이 없다면 가게는 문을 닫게 마련이죠. 나아가서 저희에게 해피어는 손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찐팬’이에요.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혼내주기도 하고, 잘하면 칭찬도 마구마구 해줄 수 있는 존재죠.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 정말 큰 힘이 돼요. 결국 저희의 근원은 해피어고, 저희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해피어이기 때문에 맨 앞에 소개를 한 거예요. 사실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해피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웃음) 그래서 해피어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내려야 저희를 몰랐던 독자 분들도 우리가 해피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우리가 팬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어서 한 저희 팀원 소개도 그런 맥락이었어요.

사실 기업 경영, 사업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어떤 요소도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먼저 얘기하는 건 드문 일 아닌가요? 

저는 그런 반응이 오히려 신기했어요. 저는 당연히 사람이 제일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등장인물을 당연히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책 후기에 많은 분들이 그 부분을 신기해하시고, 멋있다고 표현해 주셨어요. 저에게는 당연한 건데 그렇게 반응을 하시니까 우리가 진짜 사람 중심의 활동을 펼치고 있구나, 새삼 알게 됐어요. 



제품은 하나의 수단일 뿐 

“우리는 오롤리데이의 모든 팀원을 비롯해 오롤리데이와 연관이 있는 모든 사람을 해피어라고 합니다.”(9쪽)라고도 했어요.  

원래 ‘더 행복한’이라는 의미의 비교급 형용사 ‘happier’라는 단어만 있지만 저희는 ‘행복한 사람’을 해피어라고 정의해요. 저희가 ‘비해피어 캠페인’을 진행할 때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 ‘누구나 해피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해피어를 ‘오롤리데이를 좋아하는 팬’으로 한정하는 건 너무 저희 위주의 생각 같았어요. 저희 목표는 누구나 자기의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요. 콘텐츠도 그래서 만드는 거예요. 그저 오롤리데이의 팬만 만들려고 했다면 제품 열심히 팔고, 마케팅에 예산을 썼겠죠. 저희는 마케팅에 크게 관심이 없거든요.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우리의 에너지를 쏟아보자고 생각해요. 저희 콘텐츠에 제품 소개보다 습관을 만드는 방법이나 하루의 행복을 하나씩 발견하는 방법이 더 많은 것도 그 때문이고요. 어떻게 보면 행복을 발견하는 여러 맥락 가운데 저희 제품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품이 하나의 수단이라고요. 새롭게 들리는 이야기네요. 기업 입장에서는 반대로 얘기하게 마련이잖아요. 판매를 우선에 두고, 콘텐츠를 후순위에 둔다고요. 

저는 ‘당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당신의 습관을 평상시에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해요’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그 삶을 관리하는 도구로 우리에게 좋은 제품이 있어요,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만든 제품이에요’라고 말하는 게 순서 같아요. 처음에는 당연히 제품이 먼저였죠. 콘텐츠를 만들면서 우리가 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되새기게 됐어요. 저희 제품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거거든요. 행복해지려면 제품만 필요할까요? 아닌 것 같아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죠.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자극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콘텐츠를 만들고, 캠페인을 진행한 거니까요. 제품은 수단이 맞아요. 사실 캠페인은 수치로 결과가 보이지 않고, 변화가 바로 느껴지지도 않죠. 제품을 팔기 위한 콘텐츠를 만들었다면 벌써 접었을 텐데요. 메시지를 던지는 데 목표가 있으니까, 이 메시지가 사람들한테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계속 되새겼어요. 크게 넓게 오래 보고 가자는 이야기를 팀원들과 계속 했어요. 

그 덕분인지 코로나19 상황에도 오롤리데이의 온라인 매출은 오히려 상승했다고요?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지향점에 대한 확신이 생겼을 것 같아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저희가 진짜 빛나는 회사라는 걸 더 알게 된 것 같아요. 사업에 있어 핵심적인 단어가 ‘회복탄력성’ 같거든요. 사업에는 자잘하고 큰 고난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그걸 얼마나 회복하느냐가 승패를 가른다고 생각해요. 사실 코로나19는 모두의 위기였고요. 저희만의 위기도 많았어요. 인스타그램 계정 해킹, 중국의 상표 도용 사건처럼 큰일들이 있었죠. 놀라운 건 그때마다 타격이 크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게는 우리가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팀이고, 그게 우리한테 더 좋은 것을 갖다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위기를 기회로!”라고 외쳤는데 나중에는 그게 주문처럼 됐어요.(웃음) 저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진짜 팬 분들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점이 위기의 순간에 더 빛났죠. 그러면서 본질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질문했던 거예요. 진짜 위기가 기회가 된 거죠.

중국 기업의 상표 도용으로 상표권 소송을 진행중이죠. 그 과정에서도 펀딩을 하면서 역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해버렸어요. 오롤리데이의 내공도 엿보였고요. 그 과정 통과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사실 통과하지 못했어요. 약 20% 정도 왔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많아요. 사람들은 부정적 이슈를 더 잘 기억해요. 기부를 하거나 좋은 일을 했다는 건 크게 눈여겨보지 않잖아요. 그 사건이 터졌을 때 처음으로 뉴스에서 인터뷰도 해보고, 엄청난 관심도 받았는데요. 분명한 위기지만 저는 이만큼 우리가 노출될 기회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관심을 우리에 대한 애정으로 돌리는 건 우리가 어떤 행보를 보여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죠.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팀’이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우리답게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거예요. 정말 감사하게도 팬 분들이 펀딩을 열어달라고 먼저 말씀해주셨어요. 덕분에 저희도 용기를 냈죠. 소비자와 기업의 관계가 아니라 정말 동지처럼 됐어요. 펀딩을 하면서 오롤리데이스럽게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팬 분들이 보내주신 메시지와 응원을 보면서 우리 그동안 잘 해왔구나, 위안이 됐고요. 외롭지 않게 잘 싸우게 된 것 같아요. 



더 현명한 답을 찾기

조직 관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팀원들한테도 늘 강조하는 것은 ‘안전’이에요. 여기서 안전은 내가 이 조직으로부터 보호받고 있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말하는데요.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뒤에서 욕하지 않고 앞에서 내게 피드백을 줄 거다, 나한테 나쁜 감정을 갖지 않을 거다, 하는 믿음이 안전하다는 기분을 갖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 저희 팀은 되게 안전한 팀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건 대표인 저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예요. 제가 취약한 모습, 우는 모습, 힘들다고 얘기하고 실수한 것을 고백할 수 있는 건 팀원들이 그것 때문에 날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덕분이거든요. 안전한 팀워크를 만들어서 안전함이 보장되면 일은 다 잘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 방향이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을 텐데 그래도 꾸준히 이런 가치를 지향해 온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대표님에게 인사이트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대화하는 걸 되게 좋아해요. 타인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하고, 저 자신과 하는 대화도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벽 보고 대화를 되게 많이 했는데요.(웃음) 일을 하면서 흔들리는 일도 있고, 수치에 갈팡질팡 할 때가 있잖아요. 현명한 답을 내려야 할 때 저는 늘 스스로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왜?’를 아주 많이 던지는 거죠. 그냥 아이폰 메모장을 켜 놓고 막 적어요. 거기에 답을 하다 보면 좀 더 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더라고요.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합리화를 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제 경험상 합리화를 했을 때, 이 정도면 되겠다고 했을 때 꼭 뭔가 터졌어요.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엄청 곧은 길을 갈 수밖에 없고요. 그것이 그냥 도덕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업적으로도 옳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해왔던 것 같아요.

저도 대표님이 고민의 순간, 수시로 자문자답을 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또 직원 채용을 할 때도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얼마나 잘 아는지 확인하는 질문들을 제시하잖아요. 일 하는 데 있어 나를 잘 안다는 것,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매일 저를 알아가려고 되게 노력하는 사람인데요. 그러다 보니까 내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됐어요. 덕분에 억지로 하는 게 없었죠. 저는 스스로를 변덕도 심하고 어느 하나 끈기 있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일, 저한테 의미 있는 일을 만나면 엄청 집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나를 잘 아는 사람은 결국에는 더 현명한 답을 찾아가고 더 성숙한 답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채용을 할 때도, 물론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태도와 인성을 먼저 보려고 해요. 태도가 좋은 사람은 어떻게든 능력을 키우기도 하니까요. 저희 팀원 중에도 1년 만에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 친구들이 너무 많아요. 그것은 제가 잘하거나 우리 회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럴 사람을 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덕분에 그런 팀원들이 서로한테 좋은 영감이 돼 주는 걸 보거든요. 저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표님은 자신의 어떤 성향이 오롤리데이를 키워나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반면에 걸림돌이 되는 성향도 있겠죠?  

저의 장점이자 단점이 행동력 같아요.(웃음) 사실 앞뒤 생각 안 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일단 확신이 들고, 동기 부여가 충분히 되면 예산이나 타임라인, 필요 인력, 소요되는 에너지 같은 것은 생각 안 하고 일단 시작해요. 이때 장점은 성공의 경우의 수가 늘어난다는 거죠. 실패 역시 경험이잖아요. 결국 실패든 성공이든 경험치가 쌓인다는 게 장점이에요. 단점은,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웃음) 팀원들도 이런 저를 쫓아오느라 많이 힘들죠. 다행히 다들 저를 신뢰해줘서 감사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늘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더 열심히 하려는 것도 그 이유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번아웃을 많이 겪는데요. 신기한 건 그렇게 번아웃을 겪고 나면 또 성장해 있다는 점이에요. 

책에 번아웃을 알아채고 관리하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는데, 대표님은 번아웃을 일종의 성장하는 기회로 여기시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마침 오늘 본 유튜브 제목이 “뭘 해도 행복한 사람과 불만인 사람의 말버릇”이었는데요. 뭘 해도 행복한 사람은 계속해서 긍정 회로를 돌린다는 거였어요. 놀란 게, 제가 강연에서 항상 얘기했던 것도 같은 내용이거든요. 요즘 저희 직원이 많이 늘었어요. 흔히 직원이 10명 늘었다고 하면 대부분은 “월급 어떡해?”라고 하죠. 근데 저는 그 생각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보다 저는 ‘어떻게 월급을 제대로 주는 회사로 키우지?’ 하면서 가능성 쪽을 더 생각해요. 동기 부여되는 쪽으로 더 생각을 하는 거죠. 이게 습관이에요. 번아웃이 오더라도 마찬가지죠. ‘진짜 죽을 것 같아’가 아니라 ‘죽을 것 같아, 근데 여기서 또 얻는 게 있겠지’라는 식으로 늘 긍정의 결론을 지어요. 영화나 드라마도 해피엔딩 좋아하거든요. 꽉 막힌 결말을 좋아해요.(웃음) 그래서인지 제 삶에서도 행복한 결말을 항상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곧 다가올 오롤리데이의 10년, 그리고 더 먼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 계세요? 

사실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장기 로드맵을 그려본 적이 없어요. 근데 이제는 아니죠. 이 회사의 비전을 보고 들어온 친구들이 많고, 심지어 올해 시작한 NFT 같은 경우는 투자자들이 생긴 거거든요. 이 분들에게 미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 거예요. 공부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확실한 건 저는 이제 배를 떠나 로켓을 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엄청 신나고 짜릿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한데요. 저는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항상 이겼던 사람이니까요. 힘들면서도 즐겁게 해 나가려고요. 




*박신후(lolly)

행복을 파는 브랜드 ‘오롤리데이’ 대표.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줄 때 가장 큰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 롤리는, 늘 뭔가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다. 제품 기획부터 개발, 디자인, 마케팅, 전반적인 운영과 디렉팅까지 오롤리데이의 모든 것을 담당한다. 8년 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작은 사업이 어느새 많은 이들의 행복을 응원하고 또 그들에게 응원받는 어엿한 브랜드가 됐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일이 우리의 삶을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진심을 다하는 브랜드, 오롤리데이의 또 다른 시작과 도약을 위해 그간의 이야기를 엮어 보고자 한다.




행복을 파는 브랜드, 오롤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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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님 “나를 있게 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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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책.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책.’ 김달님 작가의 에세이를 읽은 독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감상을 말한다. 누구에게나 먹먹하게 가닿는 글을 쓰는 작가의 세 번째 책이 출간됐다. 백지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내내 ‘무엇을 더 쓸 수 있을까’고민했다는 작가. 그 막막함 앞에서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자꾸만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얼굴들, 지금의 김달님을 만든 사람들을. 



서른 넷의 김달님이 쓸 수 있었던 이야기 

3년 만에 출간된 책이에요. 소감이 어떤가요? 

이번 책은 ‘성덕’의 책이에요(웃음). 지난 2019년 <책읽아웃>에 출연했을 때 “친해지고 싶은 작가가 있냐”는 질문을 받고 ‘김혼비’ 작가님을 얘기했었는데, 이번에 추천사를 받았어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의 윤단비 감독님도 추천사를 써주셨죠. 제가 사는 창원에는 상영관이 없어서 서울까지 올라와서 영화를 보고, 대본집까지 샀는데 말이에요. 표지 그림을 그려주신 ‘함주해’ 작가님도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편집자님이 함주해 작가님의 그림으로 표지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주셨을 때 너무 신기했죠. 정말 성공한 덕후가 된 것 같아요. 

글을 쓸 때 반복해서 듣는 노래가 있으시다고요. 이번 책을 쓰면서는 어떤 노래를 많이 들었나요? 

최근에 마무리한 원고들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 OST ‘우리 식구(My family)’를 들으며 썼어요.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라 집중할 때 듣기 좋더라고요. 이 책을 만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천용성의 ‘보리차’예요. 글을 완성해서 편집자님께 보낼 때마다 글을 쓰면서 들었던 음악의 제목을 메일에 적어서 함께 보냈는데요. 편집자님도 그 음악을 들으며 책을 편집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출간이 늦어졌던 이유에 대해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한 시간만 1년”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첫 책 『나의 두 사람』이 ‘30년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모은 책이라면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는 그 후로부터 1년 동안 할머니를 간병하면서 떠오른 이야기들을 모두 쓴 책이었어요. 그렇다면 이 다음에는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막막했어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으니 이제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고요. 편집자님께 이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그게 작가님의 삶이라고, 그 안에서 무엇이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 된다고 말씀해주셨죠.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요. 



비슷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생각이 있으니까요. 

맞아요. 저는 여전히 가족에 대해 쓰는 게 좋아요. 제일 쓰고 싶은 이야기이고,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예요. 그걸 빼고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들었는데 이번 책을 쓰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앞으로는 우리 가족의 다른 면들을 더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예를 들면 지금까지 펴낸 책에서 할머니는 아픈 사람의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는데, 사실 무척 명랑하고 삶을 긍정하는 분이시거든요. 또 다시 책을 쓴다면 우리 가족의 새로운 모습을 더 많이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의 시선이 확장된 느낌을 가장 많이 받은 건 ‘엄마’에 대한 글이에요. 이번 책에서는 경쾌하게 엄마를 회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나의 두 사람』에 실린 ‘마더’라는 글은 서른 살에 썼어요. 당시에는 그분에 대한 원망,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곤 했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글에 담겼죠. 서른 네 살의 저는 그분을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종종 글쓰기 수업을 나가서 중학교 여학생들을 볼 때가 있는데, ‘우리 엄마가 저 나이에 나를 낳았구나.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특히 이번에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바뀐 건 그분이 나를 버렸다, 떠났다고 생각하기 보다 ‘엄마가 살아보고 싶은 삶을 선택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거기까지 나아가니 저도 좀 더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송백’, ‘동춘’, ‘대화’ 등 아버지와 고모들의 이름에 대해 쓴 글도 기억에 남아요. 모두 할아버지께서 지으셨다고요.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특별하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나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그 뜻을 살펴본 지는 얼마 안 되었고요. 어릴 때는 지금보다 더 낯을 가려서 제 이름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교과서에 ‘달님’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긴장되고, 혹시 선생님이 이름을 부를까봐 조마조마하곤 했죠. 그런데 첫 책을 출간하고 달님이라는 이름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어요. 이름과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거나, 할아버지가 멋진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김혼비 작가님도 추천사에 쓰셨죠. “김달님은 어쩜 이름도 김달님이야!” 

추천사를 받고 아이돌이 된 기분이었어요. 제가 BTS의 지민을 좋아하는데 “지민은 어쩜 이름도 지민이지?”라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웃음).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정말 좋아하셨어요.



나 혼자서 내가 될 수는 없으니 

이번 책에는 가족뿐 아니라 지금은 연락이 끊긴 어린 시절의 친구, 애인 등 작가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어요. 어떤 글을 쓸지 생각하면서 떠오른 의외의 인물이 있나요? 

이번 책에는 두 엄마에 대한 글이 모두 실렸어요. 한 편은 저를 낳아준 엄마에 대한 글이고, 다른 한 편은 아빠의 재혼으로 생긴 엄마에 대한 글이죠. 두 번째 엄마는 ‘서영’이라는 가명으로 책에 등장해요. 사실 여태껏 서영에 대한 글을 써본 적이 없어요. 일기장, SNS 등 그 어디에서도 짧은 문장조차 써본 적이 없는데 문득 이 사람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영을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어색한 마음이 늘 공존했는데 최근에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아요. 할머니, 할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지난 1년간 서영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덕분인가 봐요. 서영에 대해 쓰게 된 게 가장 의외였고, 가장 애착이 가는 글이기도 해요. 

“사실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있잖아. 나는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엄마가 원하지 않을까 봐 망설여진다고(63쪽)”라는 문장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엄마’를 하나의 애칭으로 삼겠다는 생각도 애틋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서영은 너무 젊고 예쁘고 세련된 여자였거든요. 줄곧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지만 한 번도 표현을 해 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 서영을 엄마가 아닌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여성’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하더라고요. 지금도 엄마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엄마라는 말을 애칭으로 삼자고 생각한 덕분에 한 번씩 불러볼 수 있게 되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작가님 주변에는 ‘좋은 어른’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보면 늘 저를 도와주려는 어른들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국어 선생님께서 “엄마가 필요할 때 언제든 나에게 와도 된다”고 말씀해주셨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제 대학 입시 원서비도 대신 내주셨죠. 지금껏 만난 직장 상사들도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요. 최근까지 다녔던 회사의 상사 분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언제나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 곁에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글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요. 그들에게서 들은 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글 ‘그곳으로 가자’의 주인공인 친구가 “침대 머리맡에 편지 몇 장을 붙여놨는데, 불면증이 오거나 괴로울 때 그 편지를 읽으면 계속 살고 싶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중에 제가 쓴 편지도 있다고요. 이번 책의 낭독 영상을 그 친구가 찍어줬는데, 제가 ‘그곳으로 가자’를 읽었거든요. 책이 출간되기 전에 영상을 찍었기 때문에 친구는 원고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꼼짝없이 자기에 대해 쓴 글을 듣게 되었죠. 제가 글을 읽다가 몇 번을 울어버려서 NG가 많이 났는데요(웃음). 촬영을 마치고, 친구가 “머리맡에 둘 수 있는 편지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을 해줬어요. 그 말이 너무 좋더라고요. 

글쓰기 수업에 온 아이들에게 ‘내가 기쁨을 느꼈거나, 슬픔을 느꼈던 순간 한 가지’를 생각해보라는 과제를 내주셨죠. 작가님께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최근에 느낀 기쁨과 슬픔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가 출간된 게 최근의 가장 큰 기쁨이에요. 독자 분들의 리뷰와 지인들의 응원을 보느라 내내 들떠 있었어요(웃음). 무엇도 이 기쁨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가장 슬픈 일은 2시간 전에 할머니의 면회가 취소된 거예요. 코로나 때문에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와 대면 면회를 하는 게 어려웠는데, 얼마 전부터 한시적으로 허용되어서 일년 만에 할머니를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왔거든요. 그런데 병원에 또 확진자가 나왔다고 해요. 날씨가 좋을 때 하루라도 빨리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글을 쓰는 내내 ‘너무 사적인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책을 읽은 분들이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책에 “나는 결코 나 혼자서 내가 될 수는 없음이라고(157쪽)”이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여러분을 지금의 여러분로 만들어 주었던 어떤 시절과 사람들을 떠올려볼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김달님

어느 날 교복을 입고 길을 걸어가는데, 자신을 도인이라 소개한 이가 나를 붙잡아 세우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인복이 참 많은 사람이군요. 그때는 인복이라는 게 다른 복들에 비해 시시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 복 덕분에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음을 안다. 내게 복이 있음을 알려준 많은 이들에게 부지런히 내 복을 나눠주고 싶다.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나의 두 사람』을 썼다.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김달님 저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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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청각장애인 대신 ‘농인’, 변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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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감독 ⓒ김선혜

영화 <코다>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순간, 이길보라 작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책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코다’를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가 처음 세상에 나온 2015년 이후로 ‘코다’를 아는 사람, ‘청각장애인’ 대신 ‘농인’이라 말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었다. 청인들을 고요의 세계로 처음 안내한 지도 어느덧 7년. 『반짝이는 박수 소리』 전면 개정판을 들고 돌아온 이길보라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코다’를 들어봤다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7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소감이 어떤가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처음 출간했을 때는 ‘코다'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는데 지난 7년 동안 코다, 농인, 수어, 장애, 다양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커진 것 같아요.

어떤 순간에 인식의 변화를 느끼나요?

작년에 외국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논픽션을 읽는데 ‘농인’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원문에는 deaf라고 쓰여 있었고요. deaf를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농인'이라는 한국말로 번역한 거죠. 농인이나 장애인에 관한 책이 아니어서 더 놀랐는데요. 그때 ‘농인’ ‘수어' ‘코다'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 알려졌다고 생각했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처음 냈던 2015년과 비교하면 큰 변화죠. ‘코다’를 들어봤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아졌고요.

2021년에 영화 <코다>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영화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청인 감독이 농인 배우를 섭외하여 수어와 농인 중심으로 촬영장을 만들어갔다는 지점이 좋았고요. 드디어 장애인을 연기하는 비장애인의 어색한 연기를 보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었고, 농인들이 영화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좋았죠. 농인 중심의 촬영이 영화 연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코다>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죠. 배우 윤여정 씨의 수상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아카데미 시상식은 정말 감동적이었죠. 한국인 배우 윤여정이 미국 배우 트로이 코처에게 수어로 이야기하는 장면과 트로이 코처가 손으로 말할 수 있도록 센스 있게 트로피를 받는 장면이 좋았고요. 하지만 한국의 언론이 ‘자랑스러운 윤여정! 장애인 배우를 도와주다'라는 프레임으로 집중한 건 정말 별로였어요. 한국 언론이 더 주목해야 할 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한국 언론이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요?

<코다>처럼 ‘코다'와 ‘농인'에 주목하는 영화가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혹은 장애인 배우가 아카데미와 같은 큰 무대에서 수상하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했다고 생각해요.


선하고 뻔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큐를 즐겨보셨다고요. 왜 다큐가 좋았나요?

논픽션 장르가 좋았어요. 현실에 일어나는 일인데 나의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잖아요. 농인 부모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을 다큐멘터리 영화와 논픽션 장르의 문학 작품에서 만날 수 있었죠. 다큐가 세상의 창이었던 것 같아요.

동명의 다큐 영화도 만드셨죠.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이후 동명의 책을 썼는데요. 처음부터 책과 영화를 모두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영화를 먼저 만들었는데 영화의 이야기를 책으로도 펴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책을 쓰게 됐죠.

영화와 책은 다른 점이 많잖아요. 표현하는 방식도 달랐을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는 농인 부모님이 표정으로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어 좋았어요. 일상의 소리라는 게 얼마나 작고 크게 느껴지는지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었고요. 그런가 하면 책을 쓸 때는 재구성할 수 없는 기억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죠. 영화를 만들고 배급하면서 생긴 이야기까지 전부 다룰 수 있었고요. 영화와 책이라는 두 개의 영역을 넘나들 수 있어서 다행이고 기뻐요.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를 하거나 내밀한 무언가를 꺼내 놓다 보면 ‘나’라는 사람에 몰입해서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거나 비장해지기도 하는데요. 작가님의 글에서는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코다는 농인도 청인도 아닌 끼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농인에게 청인을 설명하고 청인에게는 농인을 설명했던 경험이 많아요. 그래서 교차점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 같고요. 늘 해온 일이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죠. ‘청인은 왜 저렇게 생각하고 말할까?’ ‘농인은 왜 저렇게 생각하고 말할까?’ 하고요.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하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처음부터 거리두기를 잘했던 건 아니고요. 영화를 만들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연습했던 것 같아요. 영화와 책에 등장하는 ‘보라'와 실제 보라와의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지금은 저의 글과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이 실제 인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길보라 작가 혹은 감독이 구축한 세상 속의 사람들이죠.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농인과 농문화, 코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 기뻤지만, 반복되는 선한 질문들에 지치기도 했다고요. 반복되는 것들로 지칠 때 어떻게 회복하나요?

일단 거리를 둡니다. 그 순간으로부터 빠르게 ‘퇴근’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회복하고요. 그래야 다시 반복되는 선하고 뻔한 질문들에 웃으면서 답할 수 있거든요. 한편으로는 선하고 뻔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질문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왜 한국 사회는 이걸 지금까지 물어보는 거야?’하고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하면서 지형을 바꾸어나간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장애 인권에 대한 최근 한국 사회의 반응을 보면 더 그래요.


이길보라 감독 ⓒ윤송이

질문, 그만 받고 싶기도 아니기도 해요

헬렌 켈러가 장애인 인권운동가인 동시에 우생학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듣고 놀란 기억이 있어요. 고유한 개인인 동시에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성원으로서 누구나 겪는 어떤 모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는데요. 작가님은 자신의 모순을 느낀 적 있는지, 있었다면 어떻게 이를 이해하셨는지 궁금합니다.

100% 착하고 옳은 사람은 당연히 없겠죠? 모순까지는 아니지만, 상대방의 반응을 보면서 내 행동이나 발언을 다시 점검하는 것 같아요. 가령 책 속에 사춘기 시절의 보라가 좋아하는 남자애와 걷다가 엄마를 만나서 황급히 모른 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당시에는 제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조금 찔리긴 했지만요. 부모의 장애를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타이밍이 너무 일렀던 걸 어떡해요.

집에 돌아갔을 때 엄마가 불같이 화내며 ‘네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너도 내 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 깨달았죠. ‘엄마가 자신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감히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날 이후로 엄마처럼 뻔뻔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바꾸고, 누구를 만나도 부모님이 농인이고 저의 첫 번째 언어가 수어라고 말해요.

작가님이 기존의 언어 대신 나만의 언어를 찾은 것처럼, 어디선가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그런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자기와 비슷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와 완전히 다른 이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시길 권해요. 가령 저는 이민 2세대 자녀이거나 재일조선인의 경험을 들었을 때 ‘어떻게 코다의 경험과 이렇게 비슷할까’하고 놀라요. 그리고 이것이 코다만의 경험이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데요. 그러고 나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세상을 다르게 보는 힘이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할 테고요.

질문을 준비하면서, 작가님은 여러 상황에서 질문을 많이 받는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됐는데요.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면요?

맞아요! 이제 그만 받고 싶어요. 그런데 ‘질문을 받지 않을 때가 되면 나는 예술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하기 때문에 그만 받는 날을 꿈꾸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웃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코다라서 가장 힘든 점’ ‘부모님이 농인이라서 힘든 점'인데요. 그럴 때마다 힘든 점, 좋은 점 다 있지만, 좋은 점이 더 많을 때도 있다고 답해요.

그렇다면 반대로 아무도 묻지 않아서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도 있을까요? 

글쎄요. 아무도 묻지 않아서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다음 작업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아마 글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글이 되는 방식이겠죠. 앞으로도 코다의 관점으로 낯설게 보기와 질문하기를 할 것 같은데요. 요즘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지내고 있는데 여기에서 발생하는 경계인으로서의 관점도 잘 확장해보고 싶어요.



*이길보라(이보라)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사람.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에서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 등을 통해 자기만의 학습을 이어나갔다.‘홈스쿨러’, ‘탈학교 청소년’ 같은 말이 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자신과 같은 청소년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해 ‘로드스쿨러’라는 말을 제안했고, 그 과정을 2008년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첫 영화 <로드스쿨러>에 담았다. 2014년에는 농인 부모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은 장편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2018년에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담은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들었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
이길보라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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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상점 공동대표 3인 “처음부터 돈 벌 생각이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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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양래교, 이주은, 고금숙 저자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는 곳. 그 목소리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곳. 이곳은 알맹상점이다. 스스로를 ‘알맹러’라 부르는 이용자들은 직접 용기를 가져오거나 상점에 비치된 다회용 용기를 활용해 알맹이만을 사간다. 단순히 소비 행위만 이루어지는 공간은 아니다. 제로웨이스트라는 삶의 방식과 만나고, 그런 삶을 지향하는 또 다른 이들을 만나고, 함께 모여 세상을 바꾸는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거점이다. 알맹상점에 모인 이들은 글로벌 대기업 브리타를 대상으로 폐필터 수거와 재활용이 이뤄지도록 했으며(‘브리타 어택’), 화장품 업계가 재활용이 어려운 용기에 등급 표시를 하고 공병을 회수·업사이클링하게 만들었다(‘화장품 어택’). 상점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 자원회수센터’에서 지난 2년간 재활용된 자원의 양은 8,274킬로그램에 달한다.

알맹상점의 시작과 현재에는 고금숙, 이은주, 양래교가 있다. 상점의 공동대표인 이들은 망원시장에서 ‘비닐봉투 줄이기 활동’을 함께하며 인연을 맺었다. 세 사람은 어떻게 ‘국내 최초 리필스테이션’의 문을 열게 됐을까.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을까. 상점을 운영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쓰레기는 왜 모으는 걸까... 이 모든 이야기가 『알맹이만 팔아요, 알맹상점』에 담겼다.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알맹상점이 처음 문 열었던 날을 기억하세요? 어땠나요?

양래교 :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나 싶어서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주셨어요. 매출이 10만 원만 나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기억으로는 그날 매출이 50만 원이 넘었던 것 같아요. ‘이게 뭔 일이지?’ 싶었고 ‘오픈빨이겠거니’ 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계속 많은 분들이 오시니까 ‘이게 오픈빨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한 거죠.

예상보다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고금숙 : 캠페인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는 힘들잖아요. 이 동네에 살지 않을 수도 있고, 커뮤니티 안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여러 여건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선뜻 하지는 못했지만 같이 활동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제로웨이스트라든지 플라스틱프리를 경험해 볼 수도 있고, 동참하는 의미도 있고, 실제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하면서 소비 행위로 구현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훨씬 폭발적이었던 거죠. 

이주은 :코로나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알맹상점을 오픈할 때 코로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을 때였는데, 그러면서 쓰레기에 대한 문제나 환경 이슈가 커지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런데 알맹상점에서는 리필도 할 수 있고 쓰레기도 걷는다고 하니까 재밌게 봐주신 것 같아요.

세 분은 망원시장에서 ‘알짜(‘알맹이만 찾는 자’의 약자로, 망원시장에서 시작한 동네 모임이다)’ 활동을 하면서 처음 만나셨죠? 어떻게 의기투합하게 되셨어요?

고금숙 : 이 사람들(양래교, 이주은)이 손을 들어서 사장이 된 거죠. 며칠 전에 알맹상점 인스타그램에 출간을 알리는 글을 쓰면서 옛날에 찍은 사진들을 찾아보게 됐는데, 왜 이 사람들이 사장이 됐는지 알게 됐어요. 사진마다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두 명이었어요. 그래서 필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왼쪽부터) 양래교, 고금숙, 이주은

‘사장 하고 싶은 사람?’ 하고 물었을 때, 두 분이 손을 들었다는 말씀이시죠? (웃음)

이주은 : 네. 망원시장에서 세제 리필샵을 했을 때도 가게 차리자고 이야기했던 게 저희였던 것 같아요. 계속 이걸 해야 된다고, 우리가 해야 되지 않겠냐고,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해야 되냐고 계속 이야기했었어요. 

양래교 :해외의 제로웨이스트샵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리필하는 곳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나라는 그게 없는 게 너무 안타까운 거죠. ‘왜 우리는 못하지? 우리도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어쨌든 우리가 작게라도 세제 소분샵을 하고 있으니까 제로웨이스트샵을 해보자고 했는데, 진짜 된 거죠.

알맹상점을 준비하면서 세우신 ‘투자 원칙’이 인상적이었어요. “상점이 망해서 사업 자금이 사라져도 인생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만 투자한다” “필요 경비는 똑같이 나누지 않고 낼 수 있는 만큼씩 낸다” “투자금에 따른 수익 배분을 하지 않고 실제 일한 노동시간에 비례하게 사장들의 임금을 책정한다”는 내용에 동의하셨다고요. 

이주은 :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게 원칙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월세도 (우리가) 낼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를 제일 먼저 고민했고요. 가게를 하려면 위치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목이 좋은 곳이라도 월세가 감당이 안 되니까, (공간을) 쉐어를 하면서 시작했죠. 

양래교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저희가 돈을 벌자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만약에 돈을 벌자고 생각했으면 목을 생각했을 거고, 그러다 보면 욕심이 나니까 무리했을 거고, 투자금도 늘어났을 텐데, 저희는 애초부터 돈 벌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 재밌게 해보다가 망하면 문 닫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이런 독특한 모습의 동업 형태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돼요.

『알맹이만 팔아요, 알맹상점』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알맹상점의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고금숙 : 실제 비즈니스를 하면서 유통 과정의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하는 일들, 그 뒷이야기들을 하고 싶었고요. 저희가 요새 사업설명회 같은 걸 하는데 ‘우리 동네에도 알맹상점을 내고 싶다’는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저희가 왜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지원하고 연대하는지, 저희의 신념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알맹상점은 비즈니스로 시작한 모델이 아니잖아요. 동네에서 커뮤니티로 캠페인을 하다가 비즈니스로 진화한 사례인데, 그러면서 겪은 시행착오들이 있거든요. 그런 경험을 이야기해드리고 싶었어요. 제로웨이스트샵을 운영하고 싶은 분들이, 사업으로 접근하든 동네의 쓰레기를 줄이는 대안 플랫폼으로 접근하든, 이 책을 보고 마음을 다지고 팁을 얻기를 바랐죠. 저희가 겪은 시행착오를 그대로 경험하지 않고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양래교 :결국은 ‘누구든지 용기를 내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상점을 차리는 게 물론 쉬운 일은 아닌데, 돈이 들어가고 돈(수입)이 되게끔 운영해야 되고 책임감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누구든 환경에 관심이 있으면 작게라도 동네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캠페인도 마찬가지죠. 거창한 말이지만 서명하고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울림이 있는 거니까 같이 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거든요. 그런 메시지를 책에 담고 싶었던 것 같아요.



MZ 세대, 망원동, 그리고 알맹상점

‘브리타 어택’ ‘화장품 어택’ 등 변화를 이끌어낸 캠페인이 많았어요.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으셨을 것 같아요. 

양래교 : 브리타 어택 때는 바뀔 거라는 기대는 있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서명을 해주셨기 때문에 기대가 조금 있었는데, 이렇게 확 바뀔 거라고는 생각 못 했고요. 사실 화장품 어택은 시간이 너무 없어서 기대를 안 했어요. 그때는 이미 제도(‘분리배출 표시에 관한 지침’과 ‘포장재 재질. 구조 등급표시 기준’ 개정안)가 행정 예고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그걸 다시 뒤엎은 거였기 때문에, 저희도 하면서 되게 놀랐어요. 그런 성취감도 있고 뿌듯함도 있고, 또 저희만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동조해서 서명해주신 거잖아요. 그 자체가 계속 해야 될 이유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도 계속 배우면서 열심히 캠페인을 지속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요. 

이주은 :변화가 자꾸 보여요. 기업의 변화가 보이고, 국가 정책의 변화가 보이고. 그리고 저희가 (화장품) 리필 샌드박스 규제 특례를 받으면서 시범 운영을 하게 됐잖아요. 그런 변화들이 자꾸 보이니까 저희도 신기하고 재밌어요. 캠페인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고금숙 :저는 동료들을 얻게 됐을 때도 그런 순간인 것 같아요. 어택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어그러질 수도 있는 건데, 그렇다고 해도 좋은 거예요. 그냥 같이 하는 사람들이 좋았어요. 저희가 처음부터 알았던 사람들도 아니고, 스타일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잖아요. 그런 사람들과 만나서 동료가 되어가고 신뢰 있는 관계가 되어가고, 신뢰 가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게 되게 재밌었어요. 그래서 저는 활동을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알맹상점은 망원동에 위치하고 있어요. MZ 세대가 많이 찾는 곳인데, 그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고금숙 : 중요한 것 같아요. 이 문화를 자신들의 라이프 스타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세대가 MZ 세대인 것 같거든요. 환경 이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을 통해서 그 이슈를 풀어보고 싶어 하고, 라이프 스타일로써 민주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세대인 것 같아요. 환경 감수성이 뛰어나서, 자신이 일상에서 직접 참여해서 바꾸는 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알맹상점이 망원동에 있는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분들이 저희 상점에 많이 오세요. 

양래교 : MZ 세대가 환경 감수성도 높고 젠더 감수성도 높고, 또 워낙 SNS에 능숙하잖아요. 그들 한 명 한 명이 목소리가 돼서 퍼뜨려주는 것 같아요. 알맹상점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실천이 있고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자신은 이렇게 소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여러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세대이지 않나 싶어요. 

이주은 : 저는 MZ 세대인데요. 환경에 대한 이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세대는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시는 분들은 저를 보면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젊은 사람도 저렇게 목소리를 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거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하시더라고요. 환경이라는 이슈는 나이를 불문하고 이야기할 수 있고, 직업이나 다른 어떤 것과 상관없이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된 사항이잖아요. 그래서 더 좋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2년 전쯤 알맹상점이 처음 문 열었을 때는 ‘제로웨이스트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았었죠. 지금은 어떤 것 같으세요?

고금숙 : 큰 산업 구조를 바꿀 정도는 아니지만, 알맹상점 같은 제로웨이스트샵들이 전국에 200여 곳이 넘게 생겼어요. 작은 가게라 해도 아주 빠른 성장세죠. 그리고 이제는 제조업체에 벌크 세제나 벌크 화장품 라인이 생겼어요. 원래 없었거든요. 예전에는 ‘저희가 쓰레기를 줄이는 제로웨이스트 상점이에요’라고 하면 업체에서 못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알아들어요. 그 말을 하는 게 되게 쉬워졌어요.

양래교 :심지어 저희한테 제안을 주시는 곳도 있어요. 벌크로 공급해줄 수 있다거나 쓰레기(포장)을 벗겨서 공급할 수 있다고요. 그 자체가 굉장히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제는 환경부 같은 정부 부처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락이 와요. 물론 그 연락으로 제도가 확 바뀐 건 없지만, 제도를 바꾸려고 저희 목소리를 듣는 자체도 되게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제로웨이스트 운동이 확산되는 데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주은 : 제도죠. 제도가 문제인 것 같아요.

어떤 제도가 빠르게 개선되면 좋을까요?

이주은 : 공산품을 예로 들면 상품 표시사항이 제일 문제예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서 표시사항을 다 부착해야 되고 개인마다 안내해야 되는 건데, 예를 들어서 포크를 하나 사더라도 관련 표시사항이 다 들어가 있는 걸 나눠드려야 되는 거예요. 제일 쉬운 방법은 저렴한 비닐에 스티커 라벨을 붙이는 건데, 그러니까 포장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그리고 저희가 물건을 수입해서 올 때도 오염이라든지 뭔가 잘못 들어왔을 때를 대처하기 위해서 개별 포장을 계속 권장하더라고요. 개별 포장을 벗기기 위해서 직접 수입하고 있었던 건데 표시사항에 대한 문제들로 인해서 ‘그러면 수입할 이유가 없어지네,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게 되는 거죠. 

양래교 : 그래서 제로웨이스트샵만의 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제로웨이스트샵의 소비자들은 표시사항을 부착하는 게 필요 없다는 걸 인지하고 온 사람들이고, 운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선택권을 줘야 돼요. QR코드를 제공한다든지 사진을 찍어갈 수 있게끔 할 수 있는데, 지금 법으로는 그것조차도 안 되거든요. 소비자가 보든 안 보든 무조건 제시를 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제로웨이스트샵에 맞는 표시사항 제도가 필요해요. 그리고 중요한 건, 너무 복잡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특히 세제 같은 경우는 화학 제품이다 보니까 깨알 같은 표시사항을 다 (명시해서) 줘야 돼요. 물론 중요한 부분이죠. 화학 제품을 마시면 큰일 난다는 걸 저희도 충분히 인지하고, 그래서 저희는 ‘먹지 마세요’ 테이프를 붙여드려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무조건 표시사항을 적게 돼있어요. 

고금숙 : 2년 전에 비해서 벌크 물건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유통 과정에서 개별 포장이 안 되고 벌크 포장된 물건은 되게 소수예요. 다 개별 포장돼 있는 물건들이 유통되기 때문에 그걸 빼달라고 하기가 되게 힘들어요. 그리고 제로웨이스트 문화 확산에 걸림돌이 되는 또 하나는 사람들의 위생 관념인 것 같아요. 물론 어느 정도 깨끗하게는 해야죠. 오염된 용기에 세제를 가져가면 안 되겠죠. 그런데 그걸 넘어서서 ‘남이 쓴 것은 싫다’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건 제로웨이스트뿐만 아니라 플리스틱프리라든지 모든 환경 운동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인데요. 특히 한국 사람들이 되게 위생에 각별해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외국에서는 상품에 먼지가 쌓여 있는 모습도 흔히 보는데 한국은 그런 것들을 되게 이상하게 생각하고 컴플레인도 많아요. 

양래교 :저희가 제로웨이스트샵에 B2B 공급을 하는데 샵의 사장님들도 먼지가 있다는 이유로 컴플레인을 하시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주은 : 먼지가 제일 잘 붙는 게 실리콘이거든요. 저희가 무포장으로 실리콘을 받을 때도 먼지가 있어요. 그걸 납품하면 당연히 먼지가 있죠. (납품 받는) 가게에서는 (소비자가) 세척해서 쓸 수 있게끔 설명을 해야 되는데... 

양래교 : 무포장된 대나무 칫솔도 찌그려져서 반품하겠다는 연락이 와요.

이주은 : 그거에 대한 설득이 어려운 것 같아요.

양래교 : 맞아요. 위생이나 제품의 모양 같은 것들. 새 것에 대한 기대치라고 할까요. 

고금숙 :포장이나 껍데기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먼지 하나 없이 좋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과도한 청결 관념이거든요. 당연히 저희도 더러운 용기에 세제를 담아드리지 않아요. 그런데 먼지 같은 것 때문에 사용을 못 하겠다고 하시거나 ‘남이 썼던 건데 더러워서 어떻게 써?’라고 생각하실 때도 있어요. 그런 태도가 모두 항균이라든지 일회용품으로 연결되거든요. 깨끗하고 한 번도 남이 안 썼던 것, 나 혼자 쓰는 것, 쓰고 버리는 것, 그런 것들이 새 물건이고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회용 컵을 사용하자고 할 때 많이 봉착하는 문제가 ‘남이 씻은 걸 어떻게 믿어?’라는 반응이에요. 그런 과도한 청결과 위생 관념이 다회용품 쓰는 걸 막는 것 같아요. 특히 한국사회는 더 그런 것 같고요. 소비자들의 그런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유통이 알아서 바뀌는 일은 절대 없어요.



출판계가 갈 길이 멀어요

출간을 준비하시면서 ‘어떻게 하면 친환경적으로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이주은 : 사실 100% 재생용지를 사용하고 싶었어요. 저희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했거든요. 

고금숙 : 환경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아니고서는 저자들이 ‘함께 책을 내려면 재생용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조건으로 내걸어야 돼요. 한국에서는 재생용지로 만든 책이나 코팅을 하지 않은 책, 띠지가 없는 책을 내기가 되게 힘들거든요. 특히 환경 책을 낼 때는 저자들이 직접 길을 내야 돼요. 

양래교 : FSC 인증을 받은 용지도 있지만 저희는 무조건 재생용지를 원했어요. FSC도 정말 좋은 제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무를 자르는 거고 자원을 쓰는 거잖아요. 그런데 재생용지는 재활용해서 만든 종이이기 때문에 나무도 살릴 수 있고 버려지는 자원을 한 번 더 쓰는 거니까요. 

이주은 : 그래서 100% 재생용지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어요. 그런데 원료를 수입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고금숙 : (한국에서) 재생용지를 안 쓰니까 재생용지 시장이 엉망이에요. 그래서 다 수입제를 쓰고, 수입지니까 비싸요. 

이주은 : 그리고 수급도 너무 들쭉날쭉해서 책값이 변동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재생용지로 만들 수 있어도 지속 가능하지 않은 거죠. 그래서 재생용지 사용하는 비율을 줄이게 됐어요. 

고금숙 :한국 출판 시장이 그만큼 재생용지를 안 썼다는 거예요. 생태계가 없기 때문에 좋은 질의 재생용지를 만들려는 사업도 없고, 그러니까 외국의 재생용지를 쓰고, 가격은 비싸지고, 그러니까 또 안 쓰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컬러가 잘 나오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재생용지를 안 쓰고... 계속 반복이에요. 그리고 요새는 당연히 띠지를 만들고 얇아도 하드커버로 만들어서 책값을 높이잖아요. 책 산업마저도 껍데기를 생각하는 거죠. 이런 것들에 저항하기가 되게 힘든 것 같아요. 

양래교 :한국에서는 100% 재생용지가 안 나와요. 새 종이와 섞지 않고는 안 나오는 거예요. 종이를 모으는 재활용 체계가 제대로 안 돼 있어서 종이들이 다 섞이거든요. 수입지는 100% 재생용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탄소발자국을 쓰는 거고, 비싸기도 하고, 수급의 문제도 있고, 그래서 한국에서 나오는 재생용지로 책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100% 재생용지만으로 종이가 만들어지지 않고 재생용지와 새 펄프를 섞는 거예요. 그래야 컬러가 제대로 구현되는 얇은 느낌의 재생용지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한국에는 100% 재생용지 산업이 없어요. 다 수입지예요. 출판계가 갈 길이 멀어요. 

양래교 :결국 제도, 기업, 개인이 맞물려 있는 거죠. 개인들이 그런 책을 찾으니까 출판사들은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거고, 제도가 마련이 안 돼 있으니까 더 그런 거죠. 결국은 누구 하나의 책임이라고 말하기 되게 어려운 일이고, 모두 같이 노력해야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소비자들은 재생용지를 조금 더 찾고, 띠지 없는 책을 더 찾고, 왜 띠지가 있냐고 출판사에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고요. 출판사는 그런 걸 수용해서 바뀔 수도 있어야 되죠. 그런데 기업이 가장 잘 바뀔 수 있는 건 제도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도가 잘 만들어지면 기업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더라고요. 이번에 유색 페트병 사용이 금지된 것을 봐도 그렇고요. 그래서 제도, 기업, 개인의 삼박자가 잘 맞아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알맹상점에서는 어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나요? 

양래교 : 종이팩 이야기를 하자면, 잘 거둬들인다고 될 게 아니라 제도를 단순화시켜야 재활용이 잘 되는 구조가 되겠더라고요. 종이팩 재활용이 잘 돼야 하는 이유는 정말 많은 나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재활용이 잘 되면 나무를 살릴 수 있고 많은 자원을 아낄 수도 있는데, 많은 시민들이 모르시고 또 제대로 배출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시민 분들한테 종이팩의 가치를 알리고 제대로 배출할 의무가 있다는 걸 알리려고 하고요. 제대로 배출됐을 때 기업들도 결국 수익을 가져가잖아요. 그런데 책임을 다 안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EPR제도(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의 적용을 받고 있지만 그게 점점 낮아지고 있고요. 그걸 올릴 수 있게끔 기업들이 나서야 돼요.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정보로 거둬들일 필요가 있고, 누락되는 게 굉장히 많다는 게 문제예요. 그런 이유들로 종이팩 어택을 계속하고 있는데요. 학교에서 우유 급식을 하니까 아이들의 교육이 되게 중요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교육안을 만들어서 무료 공개를 했어요. 전국의 초중고 모든 선생님들이 자료를 마음껏 활용하셔서 교육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알맹상점 인스타그램에 오시면 링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명도 받고 있는데요. 책에 실린 QR코드를 통해서 서명하실 수도 있습니다.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와 관련된 서명운동도 시작됐죠?

양래교 :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2019년 시민들의 요구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는데요.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제대로 제도를 준비 못한 탓에 지금 모든 불만이 터져 나왔어요. 특히 프랜차이즈 본사가 쏙 빠지면서 가맹업주에게 모든 것을 떠넘긴 상황으로 인해 점주들의 불만은 터졌고, 결국 6월10일 시행되기로 한 보증금제가 6개월 유예 되었습니다. 제도 시행을 위해 환경부,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프랜차이즈 본사와 300여 차례 넘는 회의를 진행했지만 실제로 손님을 접하는 매장 점주들께는 정보전달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로 인해 가맹주 분들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라벨비용과 레벨을 붙이는 작업, 컵 보관 등 여러 가지 사안을 떠안게 된 거예요. 많은 소비자 분들은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에 고개를 갸웃하세요. 가맹업주 분들의 말씀이 틀리지 않거든요. 저희도 충분히 이해가 돼요. 하지만 일회용 컵 보증금제 제도는 다른 나라도 주목할 만한 플라스틱 줄이기에 획기적으로 좋은 방법 중 하나예요. (저희는) 플라스틱 줄이기 문화를 만들고자 6월10일 컵가디언즈 기자회견과 어택을 진행할 예정이고요. 프랜차이즈 본사와 환경부에 촉구하는 서명도 받고 있어요. 6일 만에 4천명이 넘는 분들이 서명하셨고, 만 명을 목표로 계속 서명을 받을 예정입니다.



*고금숙

플라스틱 프리 활동가·알맹상점 공동대표. 망원동을 어슬렁거리며 쓰레기를 덕질하는 '호모 쓰레기쿠스'. 대학에서 여성주의 교지를 만들면서 에코페미니즘을 접하고 일상을 ‘다르게 살기 위해’ 환경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10년 동안 여성환경연대에서 유해물질과 건강을 다루며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 생리대 유해물질 이슈화, 화장품 미세플라스틱 사용금지 등을 이뤘다. 지금은 조직과 개인 사이, 활동가와 덕후 사이, 임금과 무임금 노동 사이에서 절반은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에서 일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저 좋아서 ‘알맹@망원시장’과 온라인커뮤니티 ‘쓰레기덕질’ 활동을 한다. 개인들이 느슨한 연결망으로 이어져 세상을 휘청이게 하는 활동이 좋다. 도시와 생태의 공존을 실험한 『망원동 에코하우스』를 썼다.


*이주은 (은)


알맹상점 공동 대표. ‘욜로족’으로 살다 어느새 기후 위기와 쓰레기 문제에 빠져들었다. 나와 가족을 돌보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시장에서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말자고 같이 외치던 정 많고 따뜻한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고 있다. 배우자와 함께 쓰레기를 주우며 ‘쓰레기다이어트’ 오픈 채팅방을 운영한다.


*양래교 (래교)


남매를 키우는 주부, 제로웨이스트 유튜버, 알맹상점 대표이다. 쓰레기 문제와 알맹상점 사업 앞에서는 불도저로 변신한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제로웨이스트 유튜브 채널 <친절한 래교>를 운영한다.




알맹이만 팔아요, 알맹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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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숙,이주은,양래교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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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옥혜숙 “이것도 우리가 걱정했던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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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옥혜숙 저자

프랑스 시골 마을에 사는 옥혜숙, 이상헌 부부가 결혼 30주년을 맞아 에세이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 를 썼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사소했다. 작년 10월 말, 이상헌은 최백호의 노래 ‘부산에 가면’을 듣다가 문득 아내와 어릴 적부터 지나왔던 길과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더 잊히기 전에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글을 쓴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오랜 기간 제네바에 거주하며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며 2015년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를 썼던 이상헌은 생각의힘 출판사 대표에게 자비 출판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비자금을 총동원해 몇 부만 찍을 작정이었다. 대표는 일단 원고를 쓴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고 말했고 이상헌은 아내 옥혜숙을 설득해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자비 출판이 아닌 정식 출판을 하자는 대표의 제안. 마침내 설득 당한 이상헌, 옥혜숙 부부는 노란 빛깔의 에세이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를 탄생시켰다.



아내와 저는 글쓰기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집필 동기가 재밌습니다. 연재를 한 것도 제안을 받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상헌 : 비 오는 쓸쓸한 이른 아침이었을 거예요. ‘부산에 가면’을 듣는데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 저기 서 있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으니, 같이 쓰면 좋겠다. 저 바다의 끝은 어차피 삶의 바깥이니 우리도 알 수 없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쪽의 삶에서 나란히 써두는 것뿐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아내 분을 오래 설득하셨다고요.

이상헌 : 글을 쓰자고 하니 펄쩍 뛰더군요. 같이 쓰고 주고 받는 식으로 쓰면 되지 않느냐 했더니, 그래도 안된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먼저 몇 줄 썼어요. 이어서 쓰기로 했으니, 아내가 진도를 내지 못하면 나도 못 쓰게 된다고 배수진을 쳤습니다. 제가 힘든 것은 별일 없다는 듯이 잘 견디지만 남이 힘든 것은 두고 못 보는 아내의 약점을 ‘악의적으로’ 파고 들었죠. 그랬더니 아내는 금세 저를 불쌍히 여기고 컴퓨터 앞에 앉아 또닥또닥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쓰기 시작하자, 아내와 저는 글쓰기 '경쟁'에 돌입했지요. 얼마나 서로 몰아붙이면서 썼든지, 한 달 반 만에 초고를 마쳤습니다. 11월 초 늦은 가을비를 보면서 시작했는데, 12월말 폭설을 보며 탈고 했습니다.

옥혜숙 : 작년 10월 제 생일날 카드를 주면서 또 다른 서류 뭉치를 하나 주는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선물인가 했는데 우리 둘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자는 겁니다. 게다가 그걸 책으로 만들자며. 저는 단박에 쓸데없는 짓 한다며 뭐라고 했죠. 이걸 누가 사서 보냐고요. 그랬더니 자비로 만들어서 식구들만 돌려보면 된대요. 자기가 처음을 썼으니 읽어보고 생각 좀 해보라고 던져 놓더라고요. 제가 마음이 많이 열려있는 사람이라 포용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이게 다르게 말하면 귀가 얇아서 무슨 말이던지 훅 넘어가는 경향이 있거든요. (웃음) 아무래도 이번엔 후자가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또 홀랑 넘어가서 어느새 아침에 일어나면 잠옷 바람으로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고 있더라고요.

하하, 그런데 이게 출판물이 되었습니다. 

이상헌 : 아내를 설득해 원고를 완성했더니 저희처럼 "대책 없는" 출판사 대표와 “젊었지만 대책 없긴 마찬가지인” 편집자님이 선뜻 정식으로 책을 출판하자고 했어요. 아내는 다시 펄쩍 뛰면서, 출판사 망하게 할 일 있냐며 손사래를 쳤죠. 사실, 저도 이 점이 걱정되었지만 김병준 대표는 자신도 장사하는 사람이고 정혜지 편집자의 전문가적 소견도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들을수록 우리 부부는 더 걱정이 되는 거예요. 

옥혜숙 :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대판 싸울 뻔 했어요. 우리만 망하면 되지 왜 남까지 끌어들이냐며. 근데 출판사 대표님이랑 쑥덕쑥덕 몇 번 얘기가 오고 가더니 30대 편집자님도 찬성하셨다며 한 번 내보자고 계속 설득하길래 이젠 그냥 될 대로 되라 하고 맡겨버렸어요. 안 팔리면 우리가 다 재고를 떠 안자고 하면서요. 그게 결국 이렇게 까지 와 버렸습니다.

장정이 너무 멋진 책입니다. 

이상헌 :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예쁜 책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시골에 사는 부부가 서울의 비싼 샵에 가서 매끈하게 메이크업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 왜, 그런 느낌 있죠? 좋으면서도 어색한. 우리 이름이 적혀있지만, 우리와는 상관 없는 것 같은. (웃음) 

책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이상헌 : 사실 글을 적기 전에 제목부터 떠올랐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돌아보는 프로젝트를 해 보자고 하니, 그럼 우리가 열한 살이었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 아닌가. 그래서 프로젝트의 가제를 “우리는 열한 살에 만났다”로 하고, 구글 문서 공유해서 동시에 같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초고를 읽어본 지인이 리듬감을 위해서 “우리는”을 “우린”으로 바꾸자고 제안해서 단박에 오케이 했지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글의 리듬감을 중시합니다. 아내의 글이 특히 박자와 리듬이 좋습니다. 

프로필은 아들이, 두 분의 일러스트는 딸이 그려줬습니다. 어떻게 나온 아이디어인가요?

이상헌 : 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본인 아이디어라고 하네요 (웃음). 증거가 없으니 서로 우기고 있습니다. 초고가 완성되고 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책을 낼 때도 딸이 프로필을 그려주었고, 그게 무척 좋았거든요. 게다가 이번 책은 우리의 얘기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얘기이니까, 딸의 ‘흔적’도 남기고 싶었어요.

그런데 딸의 그림을 받고 보니, 아들에게도 뭘 부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이런 류의 글에 ‘경력’만 잔뜩 적어두는 통상적인 프로필은 전혀 안 어울릴 뿐만 아니라, 그런 통상적인 방식이 아내에게는 대단히 차별적이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엄마 아빠를 소개해 달라는 글을 써달라고 했어요. 한국말을 곧잘 하지만, 한글을 쓸 기회가 잘 없어서, 아들이 잘할 지 걱정이 되긴 했는데, 너무 잘 써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나는 아빠보다는 엄마에게 배운 게 더 많다”는 아내 프로필의 마지막 문장인데, 저는 이게 책을 가장 압축적으로 요약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자 순서가 아내 그리고 저인데, 프로필 순서는 아내가 뒤로 밀려 있습니다. 우리 프로필 소개의 마지막 문장은 저걸로 끝나야 된다고 해서 제가 우겨대었지요 (웃음). ‘비정상적인’ 프로필과 ‘비정상적인’ 소개 순서를 출판사가 너른 마음으로 수용해 주었습니다.

편집자님께 각별한 고마움이 있으신 거 같아요. 합이 잘 맞으셨나요? 

옥혜숙 :  정혜지 편집자님은 저희와 20년 정도 나이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희 글에 거부감이 없으셨어요. 요즘 누가 이런 첫사랑 타령에다 80년대 학생운동이 등장하는 유물같은 스토리를 좋아하겠어요? 근데 앞부분 조금 읽으시고 어? 이거 뭐지? 하면서 책으로 내도 될 것 같다며 저희를 끊임없이 독려해 주셨어요. 게다가 책 표지는 출판사 생긴 이래로 최고로 멋지게 만들어 주셨다고 해요. 이러니 자다가도 일어나서 고맙다고 절을 할 판국이랍니다. 무엇보다 말을 살갑게 하셔요.

이상헌 저자님은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고용정책국장으로 일하고 계세요. 요즘은 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이상헌 :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자리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커서, 그걸 분석하고 대응책 마련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인플레이션이 겹쳐서 세계 고용이 다시 악화될 조짐을 보여 초긴장 상태입니다.

타국의 생활은 어떤가요? 지금은 프랑스에 계시다고요. 

옥혜숙 : 제네바에서 오래 살다가 2년 전에 프랑스 젝스 (Gex)라는 시골 마을로 이사해서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국경을 넘어 제네바로 출퇴근을 하죠. 네온사인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어느덧 시골 생활에 적응이 되어 네온사인 대신 별을 헤며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주 1회 엠마우스라는 재활용품 판매 가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요. 작년에 입양한 강아지 운이와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남들이 보면 혼잣말인듯 보이지만 착한 사람한테는 다 들린다고요. (웃음)


(왼쪽부터) 이상헌과 옥혜숙의 어린 시절

우야든동 여기서 한번 살아보자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는 열한 살에 만나 서로를 좋아했지만 고백은 못 하고, 학력고사를 보고  다시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기까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책입니다. 각자의 글을 본 소감이 궁금합니다.

이상헌 : 아내의 글은 나와 정반대입니다. 발랄하고 즉각적이지요. 차곡차곡 쌓아가는 문장이 아니라, 물총처럼 시원하게 쏟아 대는 문장입니다. 나는 글의 줄거리를 바꾸는데 대형트럭처럼 시간이 걸리지만, 아내는 총구만 돌리면 되지요. 그래서 천상 어쩔 수 없는 낙관이 배어 있습니다. 대신, 방심하면 안됩니다. 예측불허의 반전이 숨어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내의 문장은, 그래서 “우야든동 여기서 한번 살아보자!”입니다. 

옥혜숙  :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유머나 위트가 있다는 말은 종종 듣기는 했지만 전부 구어체에 비문이 많고 사투리도 자주 섞는 편이라 SNS용 짧은 글은 몰라도 장문의 책을 쓰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요. 게다가 남편과 함께 쓰면 또 얼마나 비교가 되겠어요. 그것도 짜증나고. (웃음)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남편이 쓴 글을 보면서 웃었던 지점이 있어요. 신혼 살림을 막 시작하고 박사 과정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제가 무슨  대단한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비주류 경제학인 마르크스 경제학을 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것처럼 썼던데 사실 진짜로 그게 뭔지 잘 몰라서 맹 하니 있었던 거거든요. 아마 지금 같으면 돈 안되는 공부한다고 등짝을 한 대 때렸을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마음속 어딘가에 깊은 우물 하나가 있어, 나는 몰래 거길 찾아가 안식의 물을 퍼올 릴 수 있었다. 덥고 숨 가쁜 날이 많았지만, 목마른 날은 없었다.” 라는 이 구절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로 만나 결혼을 하고 30년을 함께 사셨어요. 서로에게 가장 고마웠던 사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상헌 : 너무 많고 경중을 따질 수가 없어요. 그래도 굳이 물어보신다면, 그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니,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준 것을 가장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웃음)

옥혜숙 : 이건 아직까지 가족도 모르는 비밀인데 10여년 전 남편이 번 아웃에서 회복한 후 얼마 있다가 제가 향수병에 걸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두말 않고 (물론 제가 나무 도마에 아채를 올려놓고 식칼을 보란 듯이 탕!탕! 두드려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행 4박 5일짜리 비행기표를 끊어 줬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친구랑 놀다가 돌아 오라면서요. 그동안 본인이 아이 둘을 다 봐주면서 지냈습니다. 그렇게 다녀오고 향수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죠.

두 분은 관심 분야, 성격, 성향 등 많은 부분이 다르신 것 같아요. 이렇게 다른 두 분이 만나서 쭉 좋아하고 사랑하고 어떻게 이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옥혜숙 :  많이 다릅니다. 저는 운전을 할 때도 익숙한 길로만 다니고 차선도 미리 바꿉니다. 남편은 무조건 처음 가는 길로 가고 차선도 막판에 가서야 바꾸죠. 이런 사소한 차이로 얼마나 많이 싸웠는지 몰라요. 대신 집안의 큰 문제를 결정할 때는 둘이 의견을 내고 합리적인 쪽의 손을 쿨하게 들어 줍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서로가 하는 일을 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관계 유지에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옥혜숙, 이상헌 저자 

결혼 후 딸을 낳고 딸의 병명을 알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셨어요. 이상헌 저자님은 학업을 이어가며 3년 반의 유학 생활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옥혜숙 저자님은 두 아이의 육아와 가정 살림을 하면서 김치 장사, 머리핀 사업에 도전하기도 하셨어요. 아내가 머리핀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말리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웃음) 

이상헌 :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라면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말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원론적’ 생각이 우선이고요. 물론 생각처럼 늘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게다가 어쩌다가 유학을 와서 저는 제 일로 바쁜 중에, 아내가 자신이 살림을 돕겠다고 나서니, 고마움은 둘째고 제가 뭐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 처참할 정도로 부실한 손수레 같은 것을 만들어 줬습니다. 그 이후로도 ‘사업’을 몇 번 벌렸는데, 두어 번 실패하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아내의 사업 수완이 낙제점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내가 절대 불굴의 낙천적 의지의 소유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려고 할 때마다 기꺼이 심정적 금전적 지원을 해 주되, 항상 액수를 못박아 정해 두었습니다. 아내에게는 ‘투자’라고 했지만, 돈이 아내에게 넘어가는 순간 저는 ‘비용 처리’했습니다 (웃음). 사실, ‘사업’이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모두 소소했습니다.

두 분의 에세이를 읽으신 독자들은 분명 옥혜숙 저자님의 낙천성에 반하실 것 같습니다. 남편의 친구들까지 사랑하는 마음,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마음은 어떻게 만들어지신 걸까요?

옥혜숙 : 아내가 예쁘면 처가집 기둥만 보고도 절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남편이 예뻐서 그 친구들도 다 좋은가 봐요”라고 대답하면 너무 재수 없겠죠? (웃음) 사실은 제가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내 친구, 남편 친구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친구들과 오래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은 무조건 반갑죠. 이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환대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게 됩니다.

닮은 듯 보이지만 성격은 많이 다른 부부입니다. 서로의 장점을 말해 주신다면요? 

이상헌 : 마루바닥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걸 보면 혹시 집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도로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나면 내가 뭘 잘못했나는 먼저 걱정하지만, 큰 일에는 신기할 정도로 낙관적이고 담대해요. 인간에 대한 낙관과 수용도는 엄청나고요. 저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믿어도 되나 싶을 때도 있는데, 아직 아내가 멀쩡한 걸 보면, 인간에 대한 신뢰는 무한탄력적인가 싶기도 합니다. 좋은 에너지는 남에게 나누어 주고, 나쁜 에너지는 속으로 삼켜야만 가능한 일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아내는 분명 그것 때문에 살이 찐다고 할 겁니다.    

옥혜숙 :저는 늘 손가락만 보고, 나무만 보는데 남편은 달을 보고 숲을 보면서 동시에 손가락과 나무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습니다. 감탄할 때도 많지만 그 때문에 저의 근시안적인 점을 지적 받을 땐 너무 얄미워서 단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왼쪽부터) 이상헌, 옥혜숙 저자 


절대 애들 앞에서 싸우지 말자

두 분의 회고록이지만 출판물이 되었습니다. 책으로 엮으면서 상상한 독자들이 있을까요? 

이상헌 : 책에도 썼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아내와 나의 ‘기록’입니다. 기록하면서 ‘독자’를 특정해서 생각할 수는 없죠. 만약 그랬다면, 글의 분위기와 내용이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온전히 둘이서 주고 받는 얘기와 누군가 지켜보는 곳에서 나누는 얘기는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원래 상업적 출판을 계획한 책도 아니었던 탓에, 이 책은 독자를 깡그리 무시한 ‘부부의 독백’으로 읽힐 가능성도 있어요. 초고를 읽어 보신 분들이 ‘상업적 성공’을 위해 많은 조언을 해주셨는데, 머리로는 백 번 공감하면서도 결국 마음이 움직이질 않아 포기했습니다. 둘이서 잠옷 입고 나눌 얘기를 정장을 갖춰 입고 하는 것 같았거든요. 물론, 이 ‘독백’에서 뭔가 ‘공유’와 ‘공감’의 틈이 있어서 독자들이 그 틈에서 자신의 ‘독백’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그런 바람대로 될 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옥혜숙 : 남편 말대로 이 글은 처음부터 우리들의 기록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상상했던 독자층은 없습니다. 다만, 저와 관계된 가족이나 친구들이 이 글을 읽음으로써 말로만 듣고 상상했던  저희 생활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요. 

부부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비결이 있을까요?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부부가 전하는 조언이 궁금합니다. 

이상헌 : 이것도 우리가 걱정했던 질문입니다. (웃음) 결혼 30주년으로 이렇게 부부가 책을 낼 정도면 뭔가 대단한 부부 아닌가 하는 환상이나 착각이 생길까 봐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그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면 난감할 수 밖에요. 우리도 자주 티격태격하고, 새로운 일이 생기면 생각이 갈라집니다. 같은 경우가 별로 없더라고요. 수십 년을 같이 살면, 생각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해 볼 능력이 조금 생길 뿐입니다. 다른 생각을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는 요령이 늘어나는 거지요. 그걸 ‘지혜’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 싶지만, 생각해 볼수록 이건 성실한 관찰을 통해 체득하는 ‘요령’에 불과해요. 아내와의 ‘특수 관계’에만 써먹을 수 있지, 보편적인 관계에는 아무 쓸모가 없거든요. 이런 특수하고 기술적인 것은 ‘요령’이지, ‘지혜’는 아닌 것 같아요. 오래 살면 생각이 같아진다는 신화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와 나는 심지어 선거 때 투표하는 곳이 달라요. 서로 물어보는데 절대 답해주질 않습니다 (웃음)

옥혜숙 :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대화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거 말고는 진짜 잘 모르겠어요. 혹시 제가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는데 그거 때문일까요? (웃음) 

부모로서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으셨나요?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상헌 : 사람들이 물어볼까 노심초사 걱정했던 질문입니다. 부끄럽지만,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가 살아간다고 바둥거렸기 때문에, 이상적인 부모상이나 자녀교육법은 없었어요. 설혹 그런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했을 겁니다. 크게 나쁜 일 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쓸데없이 목소리 높여 싸우지 않고, 아이들과 종종 싸우고 미안하다고 하고. 그런 기억뿐이지요. 고압적이지 않은 부모가 되려고 하긴 했는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무심했어요. 아내가 달리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들이 고등학교 시절에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유독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여행도 같이 가고 식사 자리에 부르고 했지요. 그런데 둘이 곧 헤어져 버렸어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나 뭐래나. 하도 어이가 없고 해서, 우리 부부는 마치 우리 일인 양 아쉬워했습니다. 자녀 일에 가장 몰두했던 시기였지 싶습니다 (웃음).

옥혜숙 :너무 아이들을 성의 없이 키운 것 같아서 한 번 더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잘해보고 싶습니다. 근데 솔직히 한 번으로 족하네요. 그래도 한 가지 자녀 양육 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절대 애들 앞에서 싸우지 말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거의 잘 지킨 것 같습니다.

최근 읽으신 책 중에 정말 좋았다는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이상헌 :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은 루신의 일기였습니다. 이 엄청난 사상가가 남긴 일기가 무려 2천 쪽이 넘는데 다 읽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거든요. 대부분은 “별일 없음”이라고 적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굉장히 통쾌했어요. “별일 없음”을 갈망하나 봐요. 물론 다른 분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웃음)

옥혜숙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입니다. 그 중에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는 로마의 인사법이 나오는데요. 혐오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함께와 더불어의 가치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라 좋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잘 나타나는 인사말이죠. 

이상헌 저자님은 <한겨레>에서 '이상헌의 바깥길' 칼럼을 연재하고 계시죠. 단독 저서 집필 계획은 없나요?

이상헌 : 아직은 없습니다. 요즘은 약간 무기력한 느낌도 있습니다. 최근의 정치적 변동도 그렇고, 제가 속한 세대가 지금 과연 사회적 발언권이 있나 싶기도 하구요. 지금도 신문 칼럼을 쓰고는 있지만, ‘바깥’ 쪽 얘기만 쓰고 있습니다. 곧 그만 써야겠다고 하고 있는데, 아직 떠밀려 쓰고 있습니다. 직장 일이 바빠서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도 또다른 이유가 되겠습니다. 꼭 한번 쓸려고 하는 책이 있긴 합니다. 제 전공분야인 고용과 노동에 대한 ‘대중적 학술서’, 말하자면 쉽게 쓰고 일상의 친숙한 소재를 가져오되 엄밀한 증거와 분석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이지요. 그런데, 그런 불가능성이 신통하게도 꽤 힘이 되어, 지금도 열심히 챙겨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상헌

"이상헌은 나의 아빠다. 늘 내게 큰 영감을 준다. 아빠는 내가 어릴 적부터 거실에 시집, 소설, 자서전, 경제 서적 등 다양한 책이 나열된 도서관을 마련해주었다. 아빠는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컸는데, 그건 큰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보다도 그의 타고난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의 작은 어촌에서 태어난 아빠가 스위스에서 경제학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매일 직접 지켜봤다. 아빠는 늘 곧고 정직한 것을 추구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보며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모습에서 나도 많이 배웠다. 아빠는 옳은 것과 정직한 것을 위하고 다른 이를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빠가 마련해주신 서재의 책들을 읽지 못했고 아빠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 하지만, 아빠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신중히 고려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두 저자의 아들, 이재원 씀)



*옥혜숙


"옥혜숙은 나의 엄마다. 집 안에 늘 기쁨을 가져다준다. 언제나 재미있고, 밝은 웃음과 미소로 방을 환하게 비춘다. 다양한 사람들을 한데 모으며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이 감탄스럽다. 나는 매일매일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를 아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엄마는 한인회 행사에서 무대를 장악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고 1등 상도 타온다. 외향적인 성격과 열린 마음 덕분에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쉽게 친해지고 가까워진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고, 친구들을 집에 자주 초대한다. 어머니가 다이어트에 실패하거나 불어를 배우는 데 어려워할 때마다 장난으로 놀리곤 하지만, 사실 나는 아빠보다 엄마에게 배운 것이 많다." (두 저자의 아들, 이재원 씀)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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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혜숙,이상헌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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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소설가 정보라, 약한 독자는 기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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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Booker Prize) 최종 발표를 2주 앞둔 날, 소설가 정보라를 만났다. 소설집 『저주토끼』로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뒤 그는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인터뷰 너무 싫어해요. 저는 다 자백했다고요.”로 시작된 대화. 올해 대학 강의를 그만둔 이야기부터 번역과 소설 작업, 시민 정보라에게 매우 중요한 ‘데모’,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활동에 이르기까지. 정보라는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 세계에서도 매우 성실한 한 사람이었다.



『저주토끼』가 번역되기까지 

루틴이 사라졌다고요.

대학 강의를 그만뒀고 인터뷰가 시시때때로 잡히고 있어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어요. 

강의를 그만둔 이유가 있나요?

팬데믹 상황에서 학교가 학생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어요. 화상 수업을 듣기 어려운 청각 장애인, 한국어로 소통하기가 어려운 외국인 학생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어요. 결국 그 학생들은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요. 등록금 장사만 하는 대학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 버티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나무위키에 나온 작가님의 프로필을 읽었어요. “드립력 또한 엄청나다. 다만 강의나 시험은 꽤나 자비 없이 빡빡하다. 학생들이 무간지옥의 행군이라고 자조할 정도.”라고 적혀 있더군요. 

제 수업을 들었던 누군가가 쓴 것 같은데, 몇 번 지웠는데도 또 올린 것 같아요.

수업이 빡빡한가요?

그건 학생들이 책을 안 읽으니까요(웃음).

2017년 출간된 『저주토끼』가 부커상 후보 지명 이후 두 달 만에 약 5만 부가 팔렸습니다(5월 12일 기준). 해외 출판 발행권을 살펴보면 미국, 인도, 브라질, 이탈리아 등 총 18개국과 계약했고 부커상 지명 전에도 영국, 일본, 폴란드, 중국, 인도네시아 등 이미 번역권을 사 간 국가가 있었고요. 이번 부커상 후보에 함께 오른 안톤 허 번역가는 『저주토끼』를 읽자마자 “영미권에서 정말 잘 통할 작품”이라고 평가하셨다고요. 정보라 작가님도 번역을 하시니까 작업이 더 수월했겠어요.

소설 번역은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라서요. 제가 석사, 박사 학위를 따는 동안에는 영어로 논문을 썼지만 문학의 언어는 어렵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무척 광범위하잖아요. 저는 한국인이니까 한국어로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제 소설을 영어로 옮길 때, 어떤 단어를 써야 어감이 가장 적절한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한국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려면 영어를 한국어보다 더 잘해야 해요. 논문을 쓸 때는 어떤 단어가 정확한지를 훈련 받아서 알지만, 소설은 논문처럼 훈련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번역가 선생님께 딱히 도움을 드린 건 없었어요. 안톤 허 선생님도 번역할 때 질문을 많이 하시는 편이 아니고요.

원작자로서 부탁한 것은 없었나요?

「안녕, 내 사랑」이라는 단편에서 주인공이 “요리를 조립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한국어판이 출간될 때는 조립에서 ‘ㅂ’을 빼서 “요리를 조리하다.”로 수정했어요. 편집부와 상의해서요. 그런데 책이 나와 보니 원래 제 의도에서는 약간 어긋나서 영어로 번역할 때는 이 표현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죠. 주인공이 로봇을 다루는 사람이라서 이 편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 한국어 감각이 일반적인 한국인과는 약간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동안 책이 안 팔린 건지도 모르겠어요(웃음).

꼭 이 나라에서는 번역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국가가 있나요?

꿈의 나라가 폴란드였는데 이미 번역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없고요. 러시아에서 뒤늦게 오퍼가 왔는데 그때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였기 때문에 작업이 제대로 진행될 것인가의 우려가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세금을 내면 그걸 갖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폭격하겠지 싶어서 거절한 상태예요.

폴란드에서 어학연수를 하셨죠? 소설 「재회」의 배경이기도 하고요.

당시만 해도 폴란드는 되게 낯선 나라였어요. 동양 사람이 별로 없어서 되게 외롭고 힘들었는데, 익숙해지니 괜찮은 종류의 외로움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인 게 그때는 인종 차별, 혐오 범죄 같은 게 없었거든요. 요즘은 달라졌지만 제가 있던 곳은 시골 구석이라 되게 평화로웠어요.기숙사에서 버스 타려고 내려가면 말들이 풀을 뜯고 있고. 폴란드를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말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어요. 되게 날씬한 말이 있는가 하면, 털이 굉장히 많고 당나귀처럼 생긴 말도 있었는데요. 크라쿠프 광장에서 관광 상품으로 옛날식 마차를 태워줘요. 최성수기가 7~8월인데 땡볕에서 말들이 하루 12시간씩 광장을 돌게 한다는 거예요. 동물권 단체들이 항의를 하기도 했는데 개선이 안 되더라고요.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대요.



내 소설은 골칫거리

1998년 연세문학상 소설 부문에 단편 「머리」가 당선되면서 작품을 쓰기 시작하셨죠. 「머리」는 소설집 『저주토끼』에 실린 작품이자 독자들로부터 “화장실에 가기 무서워졌다.”는 원성(?)을 듣게 한 호러 소설이고요.

화장실에 가면 뭔가 나올까 봐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 작품을 읽고 변비가 생긴 분들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나오는 대로 쓴다. 읽는 사람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비슷한가요? 이를테면 극단적인 상황을 쓰고 싶지만 독자들을 생각해 수위를 조절한다든가 하지 않고.

저는 약한 독자는 기르지 않아요.

와! 

아마도 그땐 제가 전업 작가가 아니고 생업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같아요. 학교도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가 된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죠.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저주토끼』에 대해 “마법적 사실주의, 호러, SF의 경계를 초월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매우 현실적인 공포와 잔인함을 다루기 위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라고 평했습니다. 작가님은 『저주토끼』를 어떻게 설명하고 싶으세요?

주목받지 못하던 시기에 내 마음대로 써보자고 생각하고 쓴 소설이에요. 해석은 독자들의 몫이니까 알아서 해석해 주시면 되고요. 자꾸만 『저주토끼』가 SF 소설로 분류돼서 속고 계신 분들도 좀 있는 거 같은데, 이 소설집은 SF가 아니라는 걸 강력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유튜브 〈과학책장〉 인터뷰에서는 “내 소설은 골칫거리”라고 표현하셨어요.

제가 종이 매체에 처음 실었던 작품이 「죽은 팔」이라는 소설인데요. 띠 동갑 이상 차이가 나는 남편과 아내, 갓난아이가 전셋집에서 살게 됐는데 그 집의 벽에 팔이 하나 매달려서 계속 벽을 때리는 이야기였어요. 그 팔을 보고 아이가 계속 우는데 남편은 그걸 못 보고 애가 계속 운다고 아내를 타박하는 내용이에요. 사실 저희 아랫집이 공사를 하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쓰게 된 소설이에요. 당시 저의 골칫거리였죠.

「저주토끼」도 쓰레기 만두 파동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죠.

네, 사건의 피해자 아드님 인터뷰를 보고 썼는데요. 대기업이 시장을 점유하려고 한 짓인데 이 집은 가정이 다 파탄이 났으니까요. 너무 억울하더라고요.사진_타별 

『저주토끼』 개정판 표지가 반응이 좋아요.

전혜진 작가님의 어린이가 책을 찍을 때마다 토끼의 숫자가 늘어나는 거냐고 물었대요(웃음). 초판의 표지는 토끼가 한 마리만 나와서요.

집필 속도가 빠른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흠. 그건 적들에게 알릴 수 없고요. 저는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구상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구상할 때 결말부터 생각하고 그다음에 첫 문장을 생각하고 제목을 정해야 하는데, 쓰는 과정에서 뭐가 잘 안 맞거나 첫 문장이 마음에 안 들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해요. 그렇게 되면 시간이 많이 걸리죠.

최근작 『그녀를 만나다』를 비롯해 작가님의 작품은 굉장히 속도감 있게 읽히거든요. 전개도 빠르고요. 어떤 문장을 선호하나요?

강렬한 문장이 좋아요.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가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쓴 시가 있는데요. “죽은 사람한테는 전화번호가 없다.”는 구절이 나와요. 수업을 위해 작품을 읽었는데 그때 저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거든요. 이 구절을 읽는데 심리적으로 트럭에 치인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가 2008년이니까 10년도 넘었는데 지금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러니까 자신이 겪어본 고통과 상실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문장들이 평생 남는 것 같아요.

SF 소설이나 장르 문학이 아직 낯선 독자들에게 팁을 주신다면요?

독자의 취향에 따라 굉장히 달라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장르 문학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 분들이라면 정소연, 김보영, 황모과, 박해울 작가님의 소설을 읽으면 좋을 것 같고요. 너무 진지하고 복잡한 작품보다는 재밌는 소설을 원하시는 분들은 곽재식, 홍지운 작가님, 그리고 전공자의 전문적인 SF를 읽고 싶다면 해도연, 김창규, 듀나 작가님 등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죠. 한 작가만 파도 올해 정도는 그냥 넘길 수 있을 거예요.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뭔가 불살라 버리고 싶은 분들이 읽고 싶은 소설!



다섯 명보다는 여섯 명이 나으니까요 

부커상 후보에 지명된 이후 수십 번의 인터뷰를 하셨죠. 아쉬웠던 점 중 하나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활동에 관한 언급이 빠졌다는 점이었다고요.

열심히 이야기를 했는데 거의 다뤄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청탁은 많아져서 기뻤습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 소속된 SF 작가들에게도 연락이 많이 왔다고 들었어요.

3기 대표로 활동하고 계시죠? 매 기수마다 블랙 정장을 입고 프로필을 찍는 전통이 있습니다.

1기가 모일 때만 해도 아홉 명으로 시작했거든요. SF 소설을 쓴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등단을 한 작가들도 아니라서 1기 대표였던 정소연 작가님이 없어 보이면 안 된다고 해서요(웃음).

최근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이름으로 ‘어린이날 100주년 축사’를 올리신 걸 읽었어요.

2022년이 어린이날 100주년이기도 했고 발의한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 한국 동화는 거의 SF라고 해요. 이제는 SF 없이는 동화를 쓸 수 없대요. 고 한낙원 선생님이 SF를 문학 장르로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셨을 때도 아동 문학이 주를 이뤘고요. 한낙원과학소설상이 아동 문학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발표하는 만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1923년에 발표된 ‘어린이 선언’ 일곱 번째 조항이 “어린이에게 잡지(책)를 자주 읽히십시오.”였습니다. 작가님은 어린 시절에 책을 많이 읽으셨나요?

책은 엄청 많이 읽었어요. 부모님이 제가 과학에 관심을 갖게 만들려고 시대마다 유행하던 어린이 책을 많이 사주셨어요. 어린이 SF 전집도 읽었고 학교 도서실에 있는 책도 많이 읽고, 크면서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같은 책도 많이 읽었고요. 그래도 작가가 되어야겠다, 그런 확고한 생각은 못 했던 거 같아요. 누구나가 그렇듯 어린 시절의 장래 희망은 바뀌고 또 바뀌니까요.

취미가 ‘데모’라고 하셨어요. 차별금지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오체투지를 했고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집회에도 참여하고 있고요. 글로만 싸우지 않는 소설가, 몸으로도 싸우는 일상을 보내고 계세요.

글로 쓸 때는 그냥 방에 앉아서 혼자 생각하는 거지만 밖으로 나가면 그 경험을 제가 실제로 갖게 되잖아요. 그리고 진짜 이야기를 듣게 되거든요. 진짜 인간의 삶 이야기를. 데모를 하면서 진짜 삶과 진짜 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저에겐 굉장히 가치가 있어요. 그리고 머릿수 하나라도 더 보태주는 게 필요할 때가 있어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경우 지금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집회를 하면 다섯 명 와 있고 그랬거든요. 다섯 명보다는 여섯 명이 나으니까 가야 해요.

곧 영국으로 출국하시죠?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 주말에 포항에서 강연을 하신다고요.

실제로 포항에 거주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수도권, 비수도권 차별이 정말 심하더라고요. 진짜 심해요. 지방 소멸이라는 게 눈앞에 보이거든요. 코로나19 이후에는 더 심해졌고요. 시내 중심가를 가도 문 닫은 가게들이 정말 많고, 임대한다는 현수막이 나달나달해졌어요. 제가 포항에서 살 생각이니까 내가 잘 살기 위해서라도 이 동네가 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포항시를 홍보하는 일에 제가 사용될 수 있다면 너무 기꺼운 마음이죠.


 

남편분이 포항 출신이시죠? 남편을 만나 프러포즈를 한 일화를 소설화한 단편 「문어」를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읽었습니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소설을 올린 2020년 8월 1일은 일명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 시행 1주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2021년 10월에는 후속작이라고 볼 수 있는 「대게」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는 시어머니까지 등장합니다. 무척 재밌게 읽었어요.

제목도 주인공도 대게지만 사실 해양 오염과 한국 주변을 둘러싼 양아치 국가들의 환경에 대한 깡패 같은 태도를 한탄하고 싶어서 쓴 이야기예요. 러시아도 일본도 바다를 끊임없이 오염시키거나 오염시킬 궁리를 하고 있는데 한 개인으로서 남의 나라 정부가 하는 일을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고 너무 답답했어요. 「대게」 후속작으로는 포항 송도 해변을 배경으로 「상어」를 쓰려고 해요. 죽도시장에서 가짜 돔배기를 파는 상인을 시장 상인들이 물리치는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싶어요.

두 편 모두 필명 ‘정도경’으로 쓰신 작품이에요. 책으로 출간되면 ‘정보라’라는 이름으로 만나겠죠?

원래는 정도경이라는 이름을 같이 쓰고 싶었어요. 번역은 정보라, 소설은 정도경. 그런데 2017년에 아작 출판사에서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을 번역하면서 정보라라는 이름을 썼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저주토끼』가 두 달 후에 나오게 됐어요. 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서 다른 이름을 쓰면 헷갈린다고 해서 그렇게 됐어요. 또 이제 안톤 허 선생님이 ‘보라 정’을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도경이는 밀려나가게 되는. 이제 슬픈 도경이는 택배나 받고 있어요.(웃음)

정도경이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별로요. 딱히 없어요.

번역가 정보라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번역을 먼저 제안하는 경우도 있나요?

처음 번역을 시작했을 때는 꽤 있었어요. 최근 5년 사이에는 청탁이 들어오는 비율이 50% 이상이 됐는데 점점 더 늘어서 이제는 70% 정도가 제안을 받아서 번역하는 경우예요. 올해 들어온 건 다 폴란드 소설이에요. 폴란드 SF 소설이 정말 재밌어요.

번역 작업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요?

문장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알기 쉽고 전개가 빠른 사건이 연이어 등장한다면 번역도 그 속도감이 느껴지도록 해야 하고, 반대로 문장이 특이하거나 기묘하고, 작품 분위기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숙고하면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면 그 분위기에 맞춰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문체나 전반적인 작품 색깔을 고려하면서 번역해야 하는 거죠.

지난 5월 출간된 세계 SF 고전 오마주 소설집 『책에서 나오다』 앤솔러지에 참여하셨고, 후속작도 곧 나온다고요.

올해는 여성주의 소설집과 환상 공포 경장편, 내년 상반기에는 연작 호러 소설집이 출간될 예정이에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을 SF로 재현한 청소년 소설집 작업에도 참여했고요.



*정보라

소설가.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SF와 환상 문학을 쓰기도 하고 번역하기도 한다.




저주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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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최지인 시인, 땅에 발 딛고 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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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살아낸 최지인 시인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뮤지션 이승윤의 추천사처럼,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는 최지인 시인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삶을 살아낸 기록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처럼, 시가 그리는 삶은 녹록치 않다. 직장 동료는 부당해고를 당하고, 사회 곳곳을 폭력과 죽음이 채운다. 그럼에도 땅에 발 딛고 일하며 ‘사랑’을 향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거듭 질문하며,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묶었다.



글쓰는 사람은 늘 다음이 있다

두 번째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가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2주만에 1만 부가 팔렸다는 수식어가 붙었는데요. 기분이 어떤가요?

굉장히 좋아요. 시를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이야말로 시인에게 가장 기쁜 일 아닐까요. 물론 좋다는 말에는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지만요. 

어떤 감정들이 있었나요?

사실 잘 정리되진 않아요. 기쁨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됐어요. 시집이 많이 팔렸다는 건 제겐 이례적인 이벤트거든요. 친구(뮤지션 이승윤)의 추천사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글쓰는 사람은 늘 ‘다음’이 있잖아요. 앞으로는 홀로 자신을 증명해 나가야겠죠.

그 말을 들으니 작가님의 시가 왜 꾸준히 변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요. 

인간은 늘 변화하는 존재 같아요. 첫 시집을 묶었을 때와 지금의 제가 달라졌듯이 계속 변할 텐데, 이왕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해요. 그러려면 무던한 노력이 필요하겠죠. ‘좋은 사람’의 정의는 계속 변하잖아요.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도 달라지고, 실제로 ‘좋은 사람’처럼 보였던 인물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했죠. 저도 머물러 있으면 굉장히 이상한 방향으로 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정진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요.

2017년에 출간된 첫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와 이번 시집을 나란히 놓고 읽었어요. 생활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면서도, 현실의 문제가 좀더 밀착되어 드러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쉽게 와 닿는달까요.

저는 종이책을 기반으로 고전적으로 활동하는 시인이기 때문에, 시집을 묶는 것이 한 시절을 매듭짓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한 권씩 낼 때마다 저라는 인간을 되돌아보게 돼요. 솔직히 이번 시집을 독자들이 쉽게 읽어주는 것에 놀라기도 했어요. 두 번째 시집을 읽고 역으로 첫 번째 시집을 편하게 읽어 주시기도 하더라고요. 제겐 신기한 일이에요.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시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시집의 화자들은 일하고 그 와중에 사랑을 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언제나 땅에 발 딛고 있는 작가이고 싶다고 생각해요. 작가마다 서 있는 위치가 다 다르잖아요.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작가도 있고, 지하세계에 들어가 내면을 바라보는 작가도 있고 역할이 다를 텐데요. 저는 기왕이면 현실 위에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를 일하게 하는 것들

홍콩 민주화 시위, 미얀마 민주화 운동,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 등 현실의 사건이 시에 언급됩니다. 이 사건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일과 공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사회에서 부당한 일들이 일어날 때, 당사자가 아닌 저는 어떻게 이 일들을 바라봐야 하나 고민이 돼요. 저는 활동가 정체성을 가진 분들처럼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제 위치를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사자가 아닌 저는 그 일들을 매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더 솔직하자면 좋은 집에 살고 싶고, 좋은 차를 몰고 싶은 욕망이 피에 흐를 정도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이 일어나고, 장애인분들이 이동권을 투쟁하고 있잖아요. 문득 나는 안전하게 살아가는데,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어요. 그럴 때 모순을 느끼죠.

시를 읽으면서 공감한 감정 중 하나가 죄책감이었어요. 방금 말한 모순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직장생활을 할 때, 부당한 일을 많이 목격했어요. 그런데 한번도 밥그릇을 내려놓고 같이 싸워주지 못했어요. 그건 비겁함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음’이기도 하겠죠. 당장 돈을 벌고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일을 한다는 건 뭘까 고민하게 돼요.

시 「세상의 끝에서」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화자는 직장 동료의 퇴사를 지켜보고, 노동 단체를 뛰쳐나와 살기 위해 이력서를 쓰죠. ‘일’이 고통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일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한다는 건 꿈꾸는 일인 것 같아요. 부끄럽지만 대학 시절에는 사회에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꿈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직장을 다니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면서 뒤늦게 이것도 굉장한 꿈이라는 걸 알았어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일이라는 단계가 필요한 거죠. 송경동 시인을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그가 “꿈꾸는 자 잡혀간다”고 쓴 적이 있거든요. 저는 그 말을 받아서 ‘꿈꾸는 자 시들지 않는다’고 쓰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을 포기할 수 없죠.

작가님은 시인으로서의 노동과, 직장인으로서의 노동을 병행하셨잖아요. 어땠나요?

시 「세상의 끝에서」에도 썼지만,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면 이루는 게 없다는 걸 느꼈어요. 그럼에도 시 쓰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죠. 또 다른 이유는 조금 이상적이에요. 어느 날 문득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어요.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절반 이상은 일한 경험이 있겠죠. 독자 대부분이 일한 경험이 있는데, 쓰는 사람인 제가 경험하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시를 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계속 일하게 한 듯해요.

무수한 일하는 날들을 지나야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이 시집에서 사랑은 일상에서 종종 반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89쪽) 하고요. 

사랑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순간이 있죠. 제가 타인을 아프게 할 때도 있고, 사랑을 하다 보면 원하던 방향과 모양이 달라질 때도 있고요. 그럴 땐, 이것도 사랑인지 의심하게 돼요. 그럼에도 ‘인간은 왜 사는가’ 물었을 때, 그 답은 사랑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요. 제가 시를 사랑하지 않으면 시를 쓸 이유가 없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많은 것을 사랑하려 애쓰는 것 같기도 해요. 시 「죄책감」에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16쪽)는 구절이 나와요. 창문에서 한 발짝 내딛으면 끝이 나겠죠. 그렇지만 반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게 사랑 같아요.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이고 싶다

시집을 펼치면 맨 앞장에 표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요. 오디오북 혹은 점자 도서로 만들어질 때를 고려하여 직접 쓴 글이라고요.

장애인 문학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A의 모든 것> 구성작가로 일하고 있는데요. 시각장애인인 손병걸 시인을 수행한 적이 있어요. 그 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졌어요. 하루는 시인이 책을 읽으시는 걸 봤는데, 중도에 시각을 잃으셔서 점자 대신 컴퓨터 낭독 시스템으로 책을 접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표지는 못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시집을 만들 때, 적어도 이 분에게는 표지를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예전에 편집자로 일할 때, 동료가 레퍼런스를 보여준 적이 있었어요.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번 책에 시도하게 됐죠.

시에도 시인님과 관계 맺은 이들의 이야기가 엮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계 맺기’는 제 글쓰기의 화두 중 하나예요. 제가 생각을 착착 정리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만큼 편견도 많아요. 고정관념을 해소하거나 확장할 수 있는 건 결국 낯선 이와 관계맺는 것이더라고요. 예전에 서울역 홈리스분들과 2년 동안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제가 상상한 모습과 실제 삶이 많이 달랐어요. 최근 이주배경 청소년, 여성분들과 교류하면서 제가 가진 편견을 되돌아보기도 했고요.

또 다른 화두도 궁금해지네요.

‘자기 기반의 글쓰기’도 중요해요. 언제나 제가 딛고 선 곳으로부터 글쓰기가 시작되었으면 하거든요. 지금 파주에 살고 있는데, 파주에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알고 보면 전국에 학살터가 정말 많거든요. 우리는 학살터 위에서 살아간다고 할 정도로요. 제 기반을 정작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가지로 조사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모두에게 안전한 공동체가 역사상 존재하기나 했을까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 인터뷰에 제가 ‘좋은 사람’으로 담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 사람을 조명할 때, 안 좋은 면은 소거해버리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저는 좋은 면, 나쁜 면을 모두 가진 사람이고, 거기에 솔직하고 싶어요.




*최지인

시인.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를 펴냈다.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이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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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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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암 환자들에게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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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양선아 <한겨레> 기자는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SNS 자기소개란에 “열정과 긍정이 삶의 모토”라고 적곤 했던 그는 평소 ‘에너자이저’로 불릴 정도로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다. 30대 후반부터 유방 엑스선 촬영은 물론 초음파검사까지 꼬박꼬박해왔기에 40대 중반의 유방암 선고는 충격적이었다. 암 진단을 받은 날, 의사는 다급하게 수술 날짜를 빨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양선아 기자는 동료 의학전문기자에게 조언을 구하고 곧장 서점으로 향했다. 한만청 박사가 쓴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를 시작으로 『유방암 환자를 위한 치료안내서』를 찾아 읽었고, 3대 표준치료라고 불리는 ‘항암-수술-방사선치료’를 무사히 받고 현재 회복 중이다.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는 양선아 기자가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했던 ‘양선아의 암&앎 시리즈’를 엮은 책이다. <한겨레>에서 20여 년간 기자로 일하며 웹진 <베이비트리>를 기획, 운영하기도 한 양선아 기자는 암 진단 뒤 ‘욕망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암을 완치하고 인생을 즐기는 할머니가 되는 것”을 꿈꾸는 양선아 기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유방암을 발견할 수 있는 자가 검진법

『내 아이를 위한 엄마의 감정 공부』 이후 두 번째 단독 저서를 쓰셨어요. 투병하며 글을 쓰는 일이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출근하는 기자가 아닌 투병하는 한 사람으로 글을 써본 경험은 어땠나요?

암 진단 초기에 블로그에 '유방암 내 삶의 일부'라는 카테고리를 열고 글을 쓰기 시작하니, 토요판 팀장을 비롯한 구성원들이 문병을 와서 신문에 글을 싣자고 하셨어요. 그런데 당시는 항암하면서 도저히 마감 시간을 지킬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치료하는 것 자체도 힘든데 내가 신문 연재글을 마감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항암-수술-방사선 치료까지 마친 뒤인 어느 날, 토요판 개편을 하면서 다시 연재글을 써보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치료를 하는 과정 내내 제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터졌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 삶의 지혜를 많이 배웠습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서 투병 과정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고, 또 암 진단 받고 “내 인생이 끝장났다”고 절망했던 저 같은 이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연재를 시작했고, 그 연재글을 묶어 책까지 출간하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게는 너무나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기자들은 취재를 하고 취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해요. 제 개인적 감정이나 느낌보다는 객관적 진실이나 사실이 더 중요하지요. 그러나 투병기에는 객관적 사실도 들어가지만 저의 감정이나 느낌도 많이 들어갔어요. 또 제가 ‘암’이라는 질병을 통과하며 깨달은 것들도 담았는데요. 연재가 나가고 나니 정말 많은 분들의 응원과 피드백들이 쏟아졌고, 네이버 댓글도 ‘선플’이 많아 신기하기만 했어요. 신문에 글이 실린다는 것의 파워도 실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1년 전에 정기검진을 하셨을 때는 괜찮았고 마사지를 받으면서 발견하게 되셨다고요. 40대 여성부터 유방암이 많이 발생하는데, 1년에 한 번 하는 건강검진 외에 유방암을 조기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유방 초음파와 같은 정기검진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자신의 유방을 아니 자신의 몸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유방이 작은 편이어서 유방암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제 마음대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유방의 크기와 유방암은 아무 관련성이 없더라고요.

유방암을 발견할 수 있는 자가 검진법이 있는데요. 매월 생리가 끝난 후 일주일 안에는 유방이 가장 부드럽다고 합니다. 그 시기에 유방을 내 눈과 손으로 만지며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거울 앞에 서서 양쪽의 유방의 모양은 어떤지 변화는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유방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거나 볼록 나온 부분이 있거나 피부에 주름이 생기거나 하면 가까운 유방외과에 가서 정밀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로는 서거나 앉은 자세, 또 편하게 누운 자세에서 촉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촉진할 때는 한쪽 팔을 들어올리고 반대편 손가락 검지, 중지, 약지의 넓은 면을 이용해 원을 그려가면서 촉진을 하는 것입니다. 혹시 가슴에 멍울 같은 것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죠. 유두를 살짝 짜서 분비물이 있다면 그것도 정밀검진 신호라고 봐야 합니다.

유방암 진단을 받고 처음 간 곳이 서점이었다고요. 동료 의학전문기자에게 병원을 추천 받으셨고요. 진단을 받은 초기에 한 일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고, 더 알지 못해 아쉬웠던 것은 무엇인가요?

암 진단 사실을 알게 된 그날 가만히 집에서 앉아있을 수 없어 부랴부랴 달려간 곳이 집 근처 서점이었습니다. 진단을 받은 초기 가장 잘한 일입니다. 암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머리 속에서는 각종 시나리오가 펼쳐집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드라마 주인공이 되면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게 되지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완전히 혼자서 고립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놓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저보다 앞서 투병한 사람들이 각종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이 쌓은 투병 노하우를 써놓은 책, 또 객관적 사실과 질병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책들을 만났습니다. 그런 책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두려움에 질식돼 투병 과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때도, 지금도 가장 잘 한 일은 책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를 만나고 거기에서 배우고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쉬웠던 점이라기보다 후회하는 것인데요. 암 진단 직전 해에 보험비가 많이 든다며 해지한 보험들이 있습니다. 보험을 해지한 뒤 이런 일을 겪으니 아쉽더라고요. 암 진단을 받으면 중증 혜택을 받아 치료비의 5%만 지불하긴 하지만, 항암 후유증 치료도 받고 제대로 된 먹거리 등을 사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독자분들도 실비 보험, 암 보험 등 평소에 꼼꼼하게 챙기면 좋겠습니다.

근로자가 질병, 부상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할 때 최저임금의 60% 정도를 지급하면서 소득 보전을 해주는 한국형 상병수당 시범사업이 올해 7월부터 시행되는데요. 이런 상병 수당 제도가 빨리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규칙적인 운동, 적당한 수면, 햇빛 쐬기

신문 칼럼을 연재하며 많은 이메일을 받으셨다고요. 자신의 질병을 오픈하는 것이 실제로 투병에 도움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요. 기자님의 경우는 어떠셨나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의료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에서 “암을 무서운 병으로 만드는 것은 질환이 아닌 사회다”라고 말합니다. 질환의 이름을 말하기조차 꺼리는 문화 안에 암에 대한 특별한 공포가 있다고 말하죠. 이러한 문화 속에서 암 환자가 낙인 찍혔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자꾸 숨지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나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라고 말합니다.

제가 암 진단 받은 사실을 숨겼다면, 제가 힘든데도 힘들다고 말을 못하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못했을 겁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됐으니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질병을 공개하고 나니 유방암을 극복한 분들이 어떻게 투병을 해야 하는지 정보도 알려주시고, 같은 질병을 가진 환우들과 경험을 공유하며 연대할 수 있었어요. 또 지인들의 응원과 배려를 받을 수 있어 투병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겨레> 직원들이 보내 온 편지와 모금액, 정말 큰 감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에는 수많은 선후배 지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 아플 때, 가장 위로가 됐던 말은 무엇인가요?

“고통은 삶의 본질에 더 집중하게 만들고,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주제에 천착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배움을 얻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다른 단단함이 있다”고 말한 한 선배의 말이 아직도 마음 속에 있습니다. 항암할 때,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할 때, 수술 전날 등이 가장 외롭고 힘든데 그때마다 함께 해주었던 선배인데요. 이 선배는 행복에 대해 천착해 『행복을 묻는 당신에게』(올 어바웃 해피니스)라는 책을 쓴 김아리 작가입니다. 고통과 행복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선배이기에, 제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읽어주고 함께 해주었던 것 같아요. 아리 선배에게 여전히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암 환우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환자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암 환자 가족들은 암 환자만큼 매우 힘든 시기를 통과할 수 밖에 없으므로 자신의 몸과 마음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고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가족의 정신 상태는 환자의 정신 상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극도의 스트레스에 처해 있고 육체적으로 지나치게 피곤하다면 환자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제공할 수 없어요. 암 투병은 매우 길고 긴 장기 마라톤과 같은 여정입니다. 그러니 지치지 않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살피시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가족들에게 부탁 하고 싶은 것은 암 치료 과정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항암 치료를 할지 말지, 수술은 어떻게 할지, 복원 수술을 할지 말지 등등 결정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또 암에 걸렸다고 하면 주변에서 이것이 암에 좋다 등등 쏟아지는 정보도 많습니다. 환자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많은 정보 가운데 옥석을 가려야 하고 또 뭔가를 선택해야 해요. 그럴 때 가족이 함께 정보를 찾아준다면 환자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또 항암 치료 과정에서 각종 부작용을 겪을 수 밖에 없는데, 그 부작용에 대해 미리 숙지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지요.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나요?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은 모든 암을 예방하는 방법과 동일합니다. 암은 내 몸의 세포가 어떤 요인에 의해 돌연변이 세포로 변해 마음대로 증식할 때 발생합니다. 따라서 일단 몸에 나쁜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나친 음주나 흡연을 자제하고, 가공 식품, 암을 유발할 수 있는 탄 음식 등을 멀리하는 것이 좋지요. 몸에 나쁜 것은 하지 말고, 좋은 것은 더 많이 하면 좋겠지요. 채식 위주의 식사와 물 충분히 먹기도 도움이 됩니다. 채소는 DNA 손상을 막아 돌연변이 세포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고요. 적당량의 물을 먹어야 혈액 순환도 잘 되고 세포도 활성화됩니다.

두 번째로는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운동은 정말 남는 장사입니다. 약간 숨이 차고 땀을 흘릴 만한 운동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한다면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골고루 섞어서 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혈액 순환부터 스트레스 해소, 암 예방까지 운동처럼 암 예방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미 많은 논문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셋째, 햇빛 쐬기와 적당한 수면 시간 확보도 중요합니다. 햇빛을 쐬면 비타민D가 피부를 통해 체내에 합성되는데요. 비타민D가 부족하면 다양한 암이 유발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암 진단 뒤 혈액검사를 해보니 비타민D 수치가 현저하게 낮더라고요. 비타민D 수치도 꼭 확인해보시고 햇빛도 하루 15분 이상 쐬세요.

암 진단 전에는 하고 싶은 것은 많고 시간이 너무 부족해 잠을 줄였습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보고 싶은 책을 보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어요. 그런데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수면 시간이 부족 하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암까지 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충분히 이완하고 몸이 회복할 수 있는 수면시간 확보가 중요합니다.

블로그 글쓰기는 계속 하고 계시죠. 최근에 2년 후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쓰셨더라고요. 이 편지를 쓰는 마음에 대해 말씀 부탁 드려요.

2019년 12월 암 진단을 받았고 2년 뒤면 완치 판정을 받는데요. 최근 완치 판정 받을 나에게 편지를 써보았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얼마 안됐을 무렵, 32살의 제가 42살의 저에게 쓴 편지를 받았습니다. 회사에서 타임 캡슐 프로젝트로 10년 뒤 자신에게 편지쓰기를 했는데 그때 제가 참여했더라고요. 우연히 그 편지를 받게 됐는데, 32살의 양선아가 42살의 양선아에게 해주었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몰라요.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 편지를 읽었지요.

그때의 경험으로 완치될 양선아에게 미리 편지를 쓰고 마음껏 축복하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2년을 어떻게 살지도 생각해보았고, 완치 판정 받을 시점에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점도 다시 적어두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평범함 일상을 되찾고 나서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마음 그걸 잊지 말라고 당부했고, 완치 판정 받더라도 해이해지지 말고 몸과 마음을 잘 살피라고 당부했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잖아요. 어느 순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까먹고 불평 불만이 스물 스물 올라오고 또 남과 나를 비교하게 되지요. 인생에서 진짜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 뭔지 잊지 않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의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세요

요즘 컨디션은 어떠신가요? 복직 날짜는 정해졌나요?

내년 2월 말 복직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희 회사는 3년 동안 병가 휴직을 할 수 있는데, 복원 수술을 마친 2년 차에 복귀할까 하다가 3년 동안 충분히 쉬고 복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간 수치도 아직 안정적이지 않고, 최근 갑상선 초음파 검사에서 결절이 발견됐는데 추적 검사도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직장에 복귀하면 식단이나 수면, 스트레스 관리 등에서 지금보다는 엄격하게 못할 테니, 차근차근 또박또박 회복하고 복귀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요즘 컨디션은 매우 좋습니다. 많이 걷고 많이 웃습니다. 책이 출간되니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 만나자고 연락이 와 많이 만나고 있는데요. 5일 연속 사람을 만나니 다크써클이 발 아래까지 내려오고 입이 부르트더라고요. 암 진단 이전의 체력만큼은 회복되지 않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체력을 키우기 위해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

회사에 다시 출근해서 가장 하고 싶은 취재 또는 글쓰기는 무엇인가요?

Now & Here. 암을 통과하며 제가 배운 것은 지금과 여기를 소중히 생각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현재는 사회정책팀 소속인데요. 그때 사정팀 상황이 어떻게 될지, 또 편집국 전체 상황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복직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 상황에 맞춰, 또 그때 저의 몸 상태에 따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내가 계획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살다 보니 인생이 절대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파도의 흐름대로 서핑하듯 맡겨보겠다는 생각이고, 체력을 키우고 몸과 마음을 더 건강하게 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집중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암 환우들에게 추상적인 응원이 아닌, 현실적인 팁과 위로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요. 

첫쨰, 의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세요. 나는 강하다, 약하지 않다, 잘 견딜 수 있다라는 생각만으로 혼자 그 힘든 시기를 통과하려고 하지 마세요. 최근 어떤 기사에서 암은 교통사고와 같다라는 표현을 썼더라고요. 교통사고가 나면 적절한 치료를 받고 주변의 도움을 받듯이, 암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 적절하게 의존하고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 힘든 시기를 잘 지나시길 빕니다. 내 마음을 터놓고 도움을 받을 사람이 많으면 좋겠지만, 사실 단 한 명만 있어도 인간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암을 통해 어쩌면 나에게 진짜로 중요한 사람이 누군인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단 한명이라도 내가 의존할 대상을 찾으세요.

둘째, 내가 의존하고 싶어도 의존할 만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땐 자기 자신이 자신의 가장 열렬한 응원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암 치료는 장기전입니다. 항암-수술-방사선 치료가 끝났다고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죠. 여러 후유증이 있고,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재발과 전이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들도 해야 합니다. 그 긴 과정에서 나를 끝까지 응원하고 다독일 사람은 나입니다. 가족마저도, 친구마저도 어느 순간 내가 암 환자라는 사실을 잊어요. 내 몸과 마음을 끝까지 살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를 믿고, 나에게 다정하게 해주세요. 아픈 것도 힘든데, 자꾸 내가 나를 평가하고 비난하고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또 내가 주체가 되어 암 공부를 하면서 암 치료에도 암 예방에도 임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암 투병을 하는 이 시기도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암에 완전히 정복돼, 온통 암 생각으로 내 삶을 채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암을 만났지만 햇빛을 쬐며 걸을 수 있다면 걷고, 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물 한잔도 마실 수 있습니다. 가족과 눈맞춤을 하며 정답게 얘기할 수도 있고, 친구들과 전화 통화도 할 수 있습니다. 온통 암 생각으로 소중한 삶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가고 싶은 곳,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등에 집중하며 ‘지금, 여기’의 삶을 충분히 누릴 권리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환우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 세 권을 소개해 주세요. 

『아픈 몸을 살다』 - 암으로 많은 것을 상실하겠지만, 또 암으로 인해 얻는 것도 많을 것이라는 관점의 전환을 만들어준 책입니다. 의료 사회학자답게 질병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또 질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4기 환자를 주로 진료하는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교수의 에세이입니다. 죽음을 앞둔 다양한 사람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루는데, 개인의 삶 하나하나가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제대로 질문해보고 생각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걷는 사람, 하정우』 - 걷기의 매력에 풍덩 빠질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인데요. 걷기의 매력과 효능에 대해 이토록 매력적으로 쓴 글은 없을 겁니다. 책꽂이에 꽂아놓고 운동에 소홀해질 때면 책을 펼치고 다시 봅니다. 그러면 다시 걷기에 대한 동기 부여가 뿜뿜 생겨납니다. 



*양선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신문방송학을 공부한 뒤, 한겨레신문사에서 20여 년간 기자로 일하며 꾸준히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다. <한겨레> 임신·출산·육아 웹진 ‘베이비트리’를 맡아 7년 동안 기획·운영한 경험도 있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에서 아동의 인권 향상과 교육 공공성 확립에 기여한 공로로 2018년, 2019년 ‘올해의 언론인상’을 받았다. 2019년 12월 유방암 진단을 받고 병가를 낸 상태다. 암 진단 뒤 ‘욕망 다이어트’ 중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걸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 암을 완치하고 인생을 즐기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며, 두 아이 민지·민규와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자존감은 나의 힘』을 썼고, 『나는 일하는 엄마다』,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를 함께 펴냈다.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양선아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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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그 퀸 모지민, 끼스럽고 아름다운 '모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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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는 MORE고 毛魚(털 난 물고기)다. 나는 나를 남성이나 여성,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길 바라지 않는다.” 드래그 퀸 아티스트 모지민 작가는 첫 에세이 『털 난 물고기 모어』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태원 지하 클럽 의 드래그 퀸 공연부터 2019년 스톤월 항쟁 50주년 기념 뉴욕 무대까지 수많은 공연에서 끼를 발산해 온 아티스트 ‘모어’. 그간 털어놓지 못했던 감정들을 에세이로 쏟아내며 그는 비로소 ‘나는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발레리나를 꿈꿨던 드래그 퀸 아티스트

첫 책을 낸 기분이 어때요?

책이 출간되자마자 저희 아파트가 뒤집어졌어요(웃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사는데요. 60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몰려와서 사인 받고 난리가 났어요. 언니라고 부르라 해서 옆집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언니가 됐고요.

제목이 강렬했어요. ‘털 난 물고기 모어’. 작가님의 활동명이기도 한데요.

원래 영어 ‘MORE’로 활동하다가, 뮤지션 이랑과 함께했던 메일링 서비스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를 할 때 한자어 뜻을 붙였더니 반응이 좋은 거예요. ‘털 난 물고기’는 이질적이고, 사회 어디에도 속하기 애매한 존재잖아요. 저를 가리키는 완벽한 2음절이죠.

원래 발레리나가 꿈이었다고요. 

체육 시간에 국민 체조를 춤 동작처럼 하니까, 선생님이 놀라서 부모님한테 ‘얘, 무용 시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제 고향은 정말 논밭밖에 없는 시골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과는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발레 하던 제자가 하루아침에 드래그 퀸 아티스트가 되어 나타났는데, 선생님이 ‘너무 강렬하고 아름답다.’고 하시더라고요. 참 신기한 일이에요.

드래그 퀸 퍼포먼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돌이켜 보면, 제 의지가 아닌 귀신의 힘이었던 것 같아요. 귀신이 제 머리채를 잡고 이태원 지하단칸방으로 데려간 거죠. 이태원 공연장에서 분장을 하고 공연을 하는데, 사람들이 제 끼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더라고요. 물론 그곳도 모든 게 폭력이었어요. ‘난 아름답게 살고 싶었는데, 왜 지하 세계에 들어와서 밤마다 이 일을 해야 하나.’ 매일 울었죠.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시간에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걸까 싶어요.

2019년 스톤월 항쟁 50주년을 기념하는 뉴욕 무대에 섰어요. 1969년 성 소수자의 권리를 사수하기 위한 항쟁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자리였죠.

60년 전통의 유서 깊은 라 마마 실험극장에 서게 된 건, 정말 꿈같은 일이었어요. 6월 한 달은 뉴욕 곳곳이 무지개로 물들고, 드래그 퀸 분장을 한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녀요. 비행 시간, 연습량 등 공연 환경은 열악했지만, 너무나 황홀했어요. 우상이었던 <헤드윅>을 연출한 존 카메론 미첼 감독과 친구가 되어 그의 집에 머무른 것도 엄청난 행운이었죠.



‘나는 있다.’고 쓰기까지

20년간 드래그 일을 하면서 이렇게 느끼셨다고요. “셀 수 없이 많은 무대와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정작 나는 없다.”(248쪽) 

무형의 퍼포먼스를 수없이 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됐어요. 수많은 무대에 서도 공연이 끝나면 관객석은 텅 비고, 그때마다 몸에는 뼈 시림과 고통이 밀려왔죠. 찬란했던 순간이 지하로 꺼지는 극렬한 고독을 느꼈어요. 사람들은 당연히 제가 무대에서처럼 아름답고 멋지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달픔이 덕지덕지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도 저의 언어와 감정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했고요.

글쓰기를 통해서 ‘나는 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요.

무대가 끝난 뒤, 일일이 관객을 찾아가서 제 감정을 나눌 수가 없잖아요. 책이 나온 지금은, 활자로 표현된 제 감정들이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게 됐어요.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보고 좀 느껴라.’라고 할 수도 있고요. 이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할 수 없어요.

‘뒤집어져, 니씨엄뚜.’처럼 작가님 특유의 말투가 글에 살아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 쓰길래 이렇게 검열 없이 자유자재로 표현할까 궁금하더라고요.

믿기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글을 스마트폰으로 썼어요. 크로키 누드 모델로 일하러 갈 때, 이동시간이 굉장히 길어요. 지하철에서 할 일이 없어서 순간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하기 시작했어요. 만약 컴퓨터 앞에 앉아서 썼으면 호흡이 길어졌겠지만, 스마트폰으로 쓰니 제 말투가 그대로 살아서 순식간에 한 편의 글이 되더라고요.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컴퓨터로 옮겨 계속 고쳤죠.

황인찬 시인이 추천사에서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일기면서 일기가 아니며, 말이면서 말이 아닌 것이 바로 모어의 글쓰기다.”라고 했죠. 일기, 소설, 희곡, 시처럼 다양한 형식이 파격적으로 펼쳐지는데요.

애초에 형식을 정해 놓지 않고 쓰는데, 주변에서 특이하다 하니 저도 신기했어요. 원고를 쓸 때, 뮤지션 이랑이 집에 놀러 와서 「마더 종잘레나와 벌미미의 산책」을 읽더니 “모어, 이거 희곡이잖아. 정말 대단하다.” 하면서 깜짝 놀라는 거예요. 에세이가 갑자기 시, 희곡으로 계속 바뀌니까 상상 이상이었나 봐요.

글 「아가야」는 정말 통쾌했어요. 차별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에게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놓죠.

어떻게 하면 나를 아프게 한 잡것들을 밟아 죽일 수 있을까, 어떻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단숨에 썼어요. 문장을 막 쏟아내다 보니 어찌나 쓰는 맛이 나는지 통쾌함 그 자체였어요. 

슬픈 장면이 나오다가도 웃음이 터지는 게 작가님 글의 특징 같아요. 굉장히 솔직하기도 하고요.

제 글은 느닷없는 문장이 갑자기 들어가고, 슬프다가도 웃긴 대목이 나오죠. 솔직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주 ‘여시같이’ 세상에 통용될 수위까지만 딱 넣어 놨어요(웃음). 아름다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작가라면 솔직하게 다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날도 있는 법」은 500연이 넘는 장시예요. 페이지를 넘길수록 작가님이 지닌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글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기까지 하루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남편과 고양이 모모 등 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죠. 지하철에서 쓴 메모를 싸그리바그리 모아서 한 번에 써 내려갔는데요. 끝을 내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끝날 듯 말 듯 계속 이어가면서 총 500연이 넘는 두 편의 시가 됐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작가님의 드래그 퀸 퍼포먼스에는 타령, 한복 등 한국 예술의 영향이 눈에 띄어요. 이번 책에도 그런 취향이 엿보이는데요. 

전라도에서 성장한 것이 제 예술의 큰 뿌리예요. 예술고등학교를 다닐 때, 영화 <서편제>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창을 달달 외웠어요. 국악 전공 친구들이 “너는 그렇게 재미없는 영화를 뭐가 좋다고 따라 하냐.” 할 정도로요. 그때부터 아이들과 나의 감성이 다르다는 걸 느꼈죠. 그런 정서가 남아서 이번 책에도 전라도 사투리가 ‘허벌나게’ 나오죠(웃음).

‘끼대디’, ‘끼마미’ 부모님 이야기도 풀어놓았어요. 한 번도 “너 이상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주셨다고요. 

저희 가족이 3남 1녀인데, 부모님은 아들인 저를 딸처럼 키우셨어요. 시골에서 사람들이 놀리면,부모님만큼은 제 편을 들면서 예쁘다고 하셨죠.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를 찍을 때, 부모님께 처음으로 드래그 퀸 분장을 보여드렸어요. 근데 아빠가 한마디 하시는 거예요. “너무 좋다. 도깨비 같고!” 엄마랑 깔깔 웃으면서 뒤집어졌거든요. 사랑의 세계 반대편에는 엄청난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 남편, 고양이 모모는 제 인생에 정말 중요한 존재들이에요.

2017년 5월 24일 한강에서 결혼식을 올린 일을 예술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어요.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결혼식이 제 인생에서 가장 멋진 무대였어요.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어 있지 않으니, 이 사랑을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편을 만난 지 20년이 넘었을 때, 제가 좋아하는 장미가 피는 5월에 한강에서 식을 올리게 됐죠. 비 예보가 있어서 직전까지 긴장했는데, 당일에는 아주 화창하고 맑은 거예요. 정말 인생에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순간이 있나 싶었어요. 이 이야기를 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지곤 해요.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가 곧 개봉하죠.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찍었다고요.

영화가 완성된 지금은 뿌듯하지만 고단한 과정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누군가 도와줬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모든 분장, 의상, 퍼포먼스 등을 제가 홀로 소화했거든요. 얼마 전에 가수 인순이 선생님을 드래그 퀸으로 변신시켜준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정말 이걸 혼자 다 하냐고요. “선생님, 저는 그렇게 하고 공연도 해요.” 하고 대답했죠.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공연하고 눈밭에도 구르고 정말 고생을 많이 하거든요.(웃음) 예쁘게 나오는 걸 다 포기하고 그냥 끊임없이 나를 보여줘야 하는 일의 연속이었어요. 매 순간 시간에 쫓기고, 집에 돌아가면 왜 그것밖에 못 했을까 자책도 하고요. 그렇게 힘들게 찍은 영화인 만큼, 빨리 관객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항상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걸 꿈꿔요. 아름다운 춤을 추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아름다운 짓들을 많이 하고 싶어요. 그간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말하기 조금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무후무한 독창성을 지닌 아티스트가 되는 것. 그게 꿈이에요.




*모지민

세계적인 드래그 퀸 아티스트. 뉴욕 스톤월 항쟁 50주년 기념 공연과 2019 헤드윅 ‘The Origin of Love’ 투어에서 공연했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가 6월 23일에 개봉된다.




털 난 물고기 모어
털 난 물고기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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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불행이 꼭 불행으로만 끝나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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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출간된 『지선아 사랑해』로 40만 독자를 만났던 이지선 작가가 새 책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펴냈다. 2000년 7월, 스물 셋 대학생이었던 이지선 작가는 오빠의 차로 귀가하던 중 음주 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전신 55%에 3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대한민국 화상 1등’이라고 불릴 만큼 심각한 화상, 살 가망이 없다는 병원의 비관적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지선 작가는 40번이 넘는 수술과 재활치료를 이겨내고 현재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살아가고 있다.

“사고와 헤어진 사람”에서 이제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 된 이지선 작가. 보스턴대와 컬럼비아대에서 각각 재활상담학,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여전히 ‘희망’을 전하는 강연도 이어가고 있다.



첫 책을 냈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요

『지선아 사랑해』 개정판이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가 2010년에 나왔으니 꼭 12년 만에 새 책을 쓰셨어요. 책 계약 당시에 사원이었던 편집자님이 이제 과장이 되셨다고요.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가 있을까요?

일단 싸이월드가 사라질 줄 몰랐어요. 싸이월드 게시판에 일기를 많이 써 놓았는데 다 날라간 거예요. 사진은 다행히 복구가 됐지만 글은 찾을 수가 없어서 1년, 2년이 지나가고 또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그래도 독자분들과 한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쁜 마음이에요. 

지금 몸담고 있는 대학에 포항에 있죠?

네. 집에서 학교가 10분밖에 안 걸리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할 일이 많지 않아 워라밸이 있는 삶을 살고 있어요. 예전에는 밤새서 수업 준비를 해야 했고 학생들 상담도 많았거든요. 팬데믹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책을 마감할 수 있었어요.

작가님의 책을 기다린 독자들이 많더라고요. 어떤 리뷰를 들을 때 가장 반갑나요?

책 구절을 옮기시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제가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서요. (웃음) 진짜 단순하게 책이 재밌었다고 하시면 좋아요. 제 책이 누군가에게 재미를 주었다면, 그것이 깔깔거리는 모습이 아니라 살며시 미소 짓는 재미여도 감사해요.

『지선아 사랑해』의 초판을 기점으로 하면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이번 책으로 독자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나요?

『지선아 사랑해』가 사고와 회복, 말하자면 사고 이후의 삶을 사실대로 기록한 책이었다면 『꽤 괜찮은 해피엔딩』은 교통사고 이후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때를 회상하면서 다시 해석되는 것들을 담은 책이에요. 사고와 회복을 동력으로 살아온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좋은 소식이 되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는 책이 아니라, 20년 전 막막하고 힘들었던 제게 큰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께 안부를 전하고 싶었고 그분들께 힘이 되는 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을 10년 전에 뵈었는데 목소리가 하나도 안 바뀌셨어요.

기자님도 하나도 안 바뀌셨어요. (웃음)

교수님이 되셔서 좀 달라지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똑같아서 놀랐어요.

목소리가 워낙 작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라서 정말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잘 안 들리죠. 강연이나 수업할 때는 마이크를 사용하지만 목소리 자체가 작아서요. 듣는 분들께 죄송하지만 또 장점이 될 때도 있어요. 오히려 더 집중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거든요.

벌써 교수가 된 지 6년차시라고요. 

마음은 되게 젊은 교수라고 생각하는데 어느덧 학생들의 부모님 나이와 약간 비슷해졌더라고요. 대화할 때도 세대 차이를 의식하게 되고요. 또 한동대학교가 독특한 문화가 많으니까요. 학생들은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사하게 지내고 있어요.

요즘 컨디션은 어떤가요? 피부 이식 수술도 계속 하고 있나요?

첫 책을 냈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요. 아픈 데도 없고요. 요즘엔 책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요. (웃음) 책에 관한 반응을 마주칠 때마다 얻는 에너지도 크고요. 수술은 조금씩 하고 있어요. 예전에 피부를 크게 이식해 놓은 자리를 조금 덜 도드라지게 하는 수술, 정리하는 수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병원 원장님과 “우리 이제 이런 간단한 것도 한다”고 말하기도 해요.



사람들의 응원과 기대, 포기할 수 없는 동력이 됐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손가락을 잃고 나서였다고요. 손가락을 정리하는 수술을 받을 즈음, “나는 진심으로 떼어내야 하는 부위가 팔 전체가 아니라 손가락 한 마디여서, 더 많이 잃지 않아서 감사할 수 있었다.(23쪽)”고 하셨어요.

손 수술을 할 때 얼굴에 인조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도 함께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마저도 다 녹아서 없어졌어요. 그때부터 저는 진심으로 제게 남은 것들, 지금 가용한 존재가 더 강렬하게 고마워졌고 이 마음으로부터 남겨진 엄지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외상 후 성장을 연구한 학자들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 표현적 글쓰기를 권한다고 해요. 당시 제 모습을 보면 하루 24시간 슬프고 외롭고 괴로운 일만 있을 것 같았지만 하루하루 희로애락이 있었거든요. 혼자 조용히 글을 쓰면서 고통을 토해내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모니터는 제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줄 수밖에 없으니까요. 모니터를 상담자 삼아 마음을 털어냈죠.

‘비교 행복’이라는 글 속에서 이지선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변하지 않았구나, 실감했어요. 반갑기도 했고요. 

예전 제 책을 읽으시거나 강연을 듣고 ‘나도 힘내서 살아야지’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가웠어요. 하지만 ‘나는 이지선처럼 다치지 않고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으니 감사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전혀 달갑지가 않았어요. 조금 갑갑하고 안타까웠죠. 왜냐면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과 비교해서 얻은 감사와 행복은 결코 오래갈 수 없어요. 비교 행복은 일시적인 진통제처럼 잠깐 위안이 될지도 모르지만 내 삶을 이끌어갈 힘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유학 생활 이야기도 책에 등장합니다. 재활상담학, 사회복지학 석사를 마치고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스스로를 ‘엘에이 쭈그리 박사’라고 표현하셨어요. (웃음)

공부하는 것이 좋아질 뻔도 했다가 그러기엔 머리가 너무 안 따라준다는 현실에 직면하기도 했어요. 모자란 지혜와 체력을 안타까워하면서 꾸준히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든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뿐이었죠. 한국에 다시 정착하기까지 11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미국의 동서부를 오가며 시애틀, 보스턴, 뉴욕, LA까지 4개 도시에서 공부를 하며 버틸 수 있었던 건 고비마다 선물처럼 찾아온 주님의 은혜와 많은 사람의 격려와 지지 덕분이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요. 고생할 만큼 했는데 뭘 또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나 생각할 때도 많았는데요. 최종적으로 못 그만둔 건 제가 너무 뱉은 말이 많아서예요. (웃음) 포기하지 못하게 된 어떤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제 삶에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았어요. 사람들의 기대와 제가 갖는 부담이 결국 제가 힘을 낼 수 있는 요인이 됐으니까요. 너무 감사하죠. 그리고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나랑 비슷한 고통을 겪은 사람을 도와 줘야지’라는 결심으로 버티다가 또 주어진 일을 그냥 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지나고, 그렇게 11년 반을 산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했지만 한 번도 “어떡하다가 그렇게 됐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요.

신기하게도 정말 그랬어요. 그런데 방학이 돼서 한국에 오면 늘 느꼈어요. 저를 전혀 모르는 처음 간 가게에서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훅 들어와서 묻는 것, 그런 일은 여전히 겪고 있어요. 예전만큼 많진 않지만요. 책에 조카 이야기를 썼는데요. 셋째 조카가 색소모반증을 갖고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수술을 해야 했는데, 어느 날은 움직이면 안 되는 상황이라 깁스를 한 상태로 식당에 갔어요. 우리 가족은 너무 즐겁게 외식을 하고 있는데 낯선 분이 와서는 “어쩌다 이렇게 팔을 많이 다쳤냐”고 묻는 거죠. 뭔가 불쾌한 관심인 거예요. 우리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꼭 알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정말 너무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또 하나의 울타리가 존재했다

요즘 질병, 돌봄 서사를 기록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죠. 나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의 가치가 정말 크다는 걸 실감합니다.

스피노자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 고통이기를 멈춘다”고 했잖아요. 물론 글로 마음을 표현하자마자 고통이 행복으로 바뀌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쓰고 나면 나를 괴롭혔던 일들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이는 건 분명해요. 지난주보다 나아진 것들을 기록하면서 지금보다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거죠. 지금 이 순간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과 조금 거리를 둘 수 있게 하는 것, 정말 글인 것 같아요.

“외상 후 성장에 대해 공부할수록 내 삶과 닮은 점을 많이 발견한다.(19쪽)”고 쓰셨어요.

‘사고를 당한 사람인가, 아니면 사고를 만났지만 헤어진 사람인가.’ 이 질문을 오랫동안 했어요. 사고와 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살지 않았고, 매일 오늘을 살았으니까요. 예상치 못해서 피할 수 없었고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제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의 뒤통수를 잠깐 째려보고 툭툭 털고 가던 길을 다시 가는 것처럼 제 미래를 ‘다시 쓰는’ 일은 저에게 놀라운 회복을 가져다 줬어요.

아픈 가족을 돌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뭘까요? 사실 저는 사고를 겪고 지금까지 가족 때문에 상처받았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가족들의 온전한 희생이 있었죠. 그리고 그 희생을 제 앞에서 티 내려고 하지 않았던 어떤 완전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상처받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 돌봄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어요. 그런데 엄마, 아빠, 오빠를 지지하는 친구들, 교회 식구들, 이모, 삼촌, 친척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잠깐씩이라도 숨을 쉴 구멍을 만들 수 있었어요. 우리 가족이 똘똘 뭉쳐서 그 어려운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저희를 둘러싼 또 하나의 울타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도 가능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은 오랫동안 푸르메재단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계시죠. 2019년 봄부터는 방송인 이성미, 송은이, 이영표, 션 씨와 함께 수감생활중인 미성년 자녀를 돕는 아동복지기관 ‘세움’을 돕는 봉사활동을 시작하셨어요.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공통점으로 만나온 제가 너무 좋아하는 분들인데요. 대화가 깊어지다 보면 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과 청년이 겪는 어려움을 걱정하는 이야기로 이어졌어요. 모임의 가장 연장자인 이성미 집사님이 함께 좋은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고 ‘세움’이라는 기관의 아이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게 됐어요. 소풍도 가고 연탄 배달 봉사도 참여하면서 아이들이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면 주말에 한 번쯤 했을 법한 일들을 함께 하고 있어요.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사회봉사를 가르치는데요. 자발적인 봉사가 가져다 주는 놀라운 힘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저도 할 말이 생긴 거예요. “내가 하고 있는데 정말 좋다”고. 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더 좋더라고요.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도 지치실 때가 있을 텐데요. 일상의 사소한 괴로움은 어떻게 푸시나요? 

이런저런 취미도 가져보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도 많이 해봤는데요. 결국은 글쓰기였고 또 친한 사람들과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긴 글을 쓰기도 하지만 SNS에 짧은 글을 쓰기도 하거든요. 글을 꼬아서 해석하거나 저를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고요.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여러 사람과 친구가 되는 에너지는 제게 많지 않아서요. 여전히 엄마에게 마음을 가장 많이 표현하는 것 같아요.



제목이 참 좋아요. 자꾸 곱씹게 되는 해피엔딩입니다.

편집자님이 정말 기가 막히게 뽑아주셨는데요.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내 삶에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때 절망의 엔딩이 아니라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있다고 기대하는 마음들이 독자분들께 생기면 좋겠어요. 불행이 꼭 불행으로만 끝나진 않거든요. 불행 안에서도 좋은 걸 찾을 수 있으니까요.

후속작을 기대해도 될까요?

오래 전에 출판사랑 동화를 쓰기로 약속했는데요. 그 약속을 아직도 못 지켰어요. 언젠가 동화를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지선

이제는 사고와 헤어진 사람. 스물세 살에 교통사고를 만나 중화상을 입고, 4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이겨내 ‘두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기막힌 운명과 화해하고 희망을 되찾기까지 그녀가 발견한 삶의 비밀을 첫 책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를 통해 전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꽤 괜찮은 해피엔딩
꽤 괜찮은 해피엔딩
이지선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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